경성축구단
경성축구단(京城蹴球團)은 1933년 창단된 경성을 대표하였던 축구단이다.
평양축구단과의 경평대항축구전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던 팀으로도 익히 알려져있다.
역사[편집]
창단[편집]
1933년 경성축구단의 창단 이전까지, 경성 축구계를 대표하는 축구단은 불교청년회 (1918 ~ 1925)와 조선축구단 (1926 ~ 1933)이었다. 특히 이들은 평양의 무오단과 함께 조선 축구의 양강 구도를 형성하며 1920년대 한국 축구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선축구단과 무오단, 모두 재정적 위기로 활동이 뜸했는데.. 1933년 1월, 평양 축구계가 무오단 멤버를 기반으로 평양을 대표하는 평양축구단을 창단을 선언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경성 축구계는 경성을 대표하는 축구단 설립에 박차를 가해, 1933년 3월 28일 준비위원회 구성에 이어, 동년 4월 6일에는 평양축구단 초청으로 평양에서 열린 경평전에 참여를 결정하게 된다.[1]
그리고 5월 11일 종로 백합원(百合園)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경성축구단 창단 성명을 발표하였다. 당시 경성축구단 창단에는 여운형 이사장과 관철동 내 부자로 유명했던 배석환 씨[2] 의 지원 등이 결정적이었으며[3] 연희전문과 보성전문 출신들이 주축이 되었다고 한다.
활동과 해체[편집]
경성축구단은 창단 후 경평대항축구전에 참가하고, 1935년에는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와 명치신궁경기대회에 참가하였던 조선축구대표팀의 주축으로 자리매김하는등,[4] 활발한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1942년을 끝으로 일제의 체육활동 전면 중단 명령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선수단[편집]
창단 당시 멤버는 아래와 같다.[5]
포지션 | 이름 | 전 소속팀 | |
---|---|---|---|
스탭진 | |||
이사장 | 여운형 | - | |
이사 | 유억겸[6]ㆍ이용설[7]ㆍ배석환 현정주ㆍ김상익 | ||
간사 | 이영선ㆍ이창진 | ||
감독 | 현정주 | ||
선수단 | |||
GK | 이혜봉 | 연희전문 | |
FP | 정용수 | ||
박석연 | |||
이창용 | |||
이종만 | 연희전문 OB | ||
전경신 | 세브란스의전 | ||
서형남 | |||
윤중호 | 세브란스의전 OB | ||
이용겸 | |||
김용식 | 보성전문 | ||
한우량 | |||
하영득 | |||
송기우 | |||
김화집 | 보성전문 OB | ||
이영민 | 조선식산은행[8] | ||
백기주 | 진남포[9] | ||
송기수 | 송도고보[10] | ||
유약한 | 철도국 | ||
채금석 | 경신학교 OB | ||
최성손 |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 ↑ 즉 팀 창단 이전에, 경기가 잡힌 셈이다. 두 지역 간 라이벌 의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인 셈.
- ↑ 1910년대에 민간인 신분으로는 거의 최초로 자동차를 들여와 타고 다닐 정도로 거부였으며, 명창 등 당대 연예인들에 대한 후원도 아끼지 않는 재력가였다. 하지만 광복 이후 6.25를 거치면서 강원도 통천과 망우리 일대에 있던 전답이 모두 사라져 말년은 불행하게 보냈다고.. 관련 기사 : [1]
- ↑ 덕분에 경기를 앞두고 그때그때 모여 자비로 훈련비와 식대를 해결하던 불교청년회 시절과 달리, 경기 계획이라도 잡히면 YMCA 옆 여관에 숙소를 잡고 합숙을 실시하며 컨디션을 조절할 정도로 체계화되었다고 한다.
- ↑ 두 대회 모두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 정예 멤버들이 차출되었으며, 무패 우승을 석권하였다.
- ↑ 출처 : [2]
- ↑ 당시 연희전문 부교장
- ↑ 당시 세브란스의전 내과의
- ↑ 조선식산은행에는 축구부가 아니라 야구부가 존재하였고, 이영민 선수는 식산은행 에이스 타자였다. 즉 야구 선수 겸 축구 선수였던 셈.
- ↑ 백기주 씨는 연희전문 야구부 출신으로, 당시 진남포군 야구부 소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사항은 아시는 분이 추가 바람
- ↑ 당시 송도고 교사로 재직 중이었으며, 평양축구단과 경성축구단 양쪽에 창단 멤버로 이름을 올리는 기록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