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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은행 축구단'''은 1969년 1월 창단되어 1988년 12월 해체한 실업축구단이다. 보통 줄여서 '''상은'''으로 불리었고 [[산업은행 축구단]]하고는 이름은 거의 비슷하지만 다른 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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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상업은행'''(韓國商業銀行)1899년 1월 30일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이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어 조선상업은행, 한국상업은행을 거쳐 [[한일은행]]과 합병하여 한빛은행이 되면서 해체된 대한민국은 은행으로 현재 [[우리은행]]의 전신이다. 보통 한국이라는 명칭을 빼고 '''상업은행'''이라고 하며, 줄여서 '''상은'''이라고도 한다. '''상업은행 축구단'''은 1969년 1월 창단되어 1988년 12월 해체한 실업축구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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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9년]] 1월 30일 - 서울의 유력한 상인과 고종황제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전신인 '''{{주석|대한천일은행|은행명은 '일본 제일은행'을 의식해 지은 것으로, '하늘 아래 첫째 가는 은행'이라는 뜻이다.}}'''설립, 초대 은행장으로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한 민병석 임명, 일반은행업무 및 황실 및 주요 기관의 재정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은행업무 동시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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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9년]] 5월 - [[인천광역시|인천]]에 첫 지점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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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년]] -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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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년]] - 대동은행 흡수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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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 삼남은행 흡수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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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 광복 이후 '''한국상업은행'''으로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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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 증권거래소 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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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4월]] - 시중은행 최초 상업은행 여자농구팀(현, [[우리은행 한새]]) 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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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11월 11일 - [[대한민국]] 은행 최초 [[일본]] 도쿄에 지점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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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 상업은행 축구단 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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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년]] [[6월 23일]] - 은행 민영화 (한국 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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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 [[IMF사태]] 이후 예금보험공사가 지분 73% 매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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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1월 4일]] - [[한일은행]] 합병 (총 자본금 4조 3,725억원), '''한빛은행'''으로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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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 지주회사 체계로 전환, 우리금융그룹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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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12월 31일]] - 평화은행 은행부문 흡수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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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5월 20일]] - '''우리은행'''으로 행명 및 CI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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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단 과정 ==
 
== 창단 과정 ==
당시 [[대한축구협회]] 재무이사 이자, 당시 재무부 이재국장이었던 [[장덕진]] 씨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상업은행 축구단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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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은행 추국단의 창단은 [[1969년]] 당시, [[대한축구협회]] 재무이사 이자 재무부 이재국장이었던 [[장덕진]]씨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시작이었다.
  
이때만 해도 국가가 은행을 통제하던 시절이니 재무부 이재국장의 직위는 상당히 막강한 파워를 갖고있었고, 이러한 장씨의 축구단 창설 요청에 상업은행을 비롯해서 여러 은행들은 군소리 없이 축구단 창단에 열을 올렸다. 덕분에 1969년에만 상업은행 축구단을 시작으로, [[주택은행 축구단]], [[외환은행 축구단]], [[조흥은행 축구단]], [[신탁은행 축구단]], [[제일은행 축구단]], [[산업은행 축구단]]이 생겨났고 이듬해인 1970년에도 [[한일은행 축구단]], [[기업은행 축구단]]이 창단되는 등 한국축구 사상 유례없는 폭발적인 팀 증가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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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만 해도 국가가 은행을 통제하던 시절이니 재무부 이재국장의 직위는 상당히 막강한 파워를 갖고있었고, 거기에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라는 든든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장씨의 축구단 창설 요청에 상업은행을 비롯해서 여러 은행들은 군소리 없이 축구단 창단에 열을 올렸다. 덕분에 1969년에만 상업은행 축구단을 시작으로, [[주택은행 축구단]], [[외환은행 축구단]], [[조흥은행 축구단]], [[신탁은행 축구단]], [[제일은행 축구단]], [[산업은행 축구단]]이 생겨났고 이듬해인 1970년에도 [[한일은행 축구단]], [[기업은행 축구단]]이 창단되는 등 한국축구 사상 유례없는 폭발적인 팀 증가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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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성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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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해체된 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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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13일 (토) 18:20 판

한국상업은행(韓國商業銀行)은 1899년 1월 30일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이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어 조선상업은행, 한국상업은행을 거쳐 한일은행과 합병하여 한빛은행이 되면서 해체된 대한민국은 은행으로 현재 우리은행의 전신이다. 보통 한국이라는 명칭을 빼고 상업은행이라고 하며, 줄여서 상은이라고도 한다. 상업은행 축구단은 1969년 1월 창단되어 1988년 12월 해체한 실업축구단이다.

연혁

  • 1899년 1월 30일 - 서울의 유력한 상인과 고종황제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설립, 초대 은행장으로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한 민병석 임명, 일반은행업무 및 황실 및 주요 기관의 재정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은행업무 동시 수행
  • 1899년 5월 - 인천에 첫 지점 개설
  • 1911년 -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
  • 1925년 - 대동은행 흡수합병
  • 1928년 - 삼남은행 흡수합병
  • 1945년 - 광복 이후 한국상업은행으로 개칭
  • 1956년 - 증권거래소 상장
  • 1958년 4월 - 시중은행 최초 상업은행 여자농구팀(현, 우리은행 한새) 창단
  • 1966년 11월 11일 - 대한민국 은행 최초 일본 도쿄에 지점 개설
  • 1969년 - 상업은행 축구단 창단
  • 1981년 6월 23일 - 은행 민영화 (한국 최초)
  • 1997년 - IMF사태 이후 예금보험공사가 지분 73% 매입
  • 1999년 1월 4일 - 한일은행 합병 (총 자본금 4조 3,725억원), 한빛은행으로 개칭
  • 2001년 - 지주회사 체계로 전환, 우리금융그룹 출범
  • 2001년 12월 31일 - 평화은행 은행부문 흡수합병
  • 2002년 5월 20일 - 우리은행으로 행명 및 CI 변경


상업은행 축구단

창단 과정

상업은행 추국단의 창단은 1969년 당시, 대한축구협회 재무이사 이자 재무부 이재국장이었던 장덕진씨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시작이었다.

이때만 해도 국가가 은행을 통제하던 시절이니 재무부 이재국장의 직위는 상당히 막강한 파워를 갖고있었고, 거기에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라는 든든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장씨의 축구단 창설 요청에 상업은행을 비롯해서 여러 은행들은 군소리 없이 축구단 창단에 열을 올렸다. 덕분에 1969년에만 상업은행 축구단을 시작으로, 주택은행 축구단, 외환은행 축구단, 조흥은행 축구단, 신탁은행 축구단, 제일은행 축구단, 산업은행 축구단이 생겨났고 이듬해인 1970년에도 한일은행 축구단, 기업은행 축구단이 창단되는 등 한국축구 사상 유례없는 폭발적인 팀 증가를 경험하게 된다.


  • 상업은행 축구단은 1969년 1월 10일 상업은행 본점 강당에서 창단식을 가졌으며 당시 창단 멤버는 아래와 같다.


  • 코치
김동근
  • 선수단
김상진, 김호, 김삼락, 권경진, 양정석, 박정출, 정영철, 김규대, 문홍, 김호곤, 박삼환, 이흥구, 김종태, 윤승준, 주성해, 이광삼, 이원우, 김진상


해체

다른 금융축구단이 1983년 수퍼리그의 개막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상업은행 축구단은 계속 운영을 지속해나갔으나 결국 1988년 12월 경영개선을 이유로 당시 상업은행 야구단과 함께 전격 해체결정되어 스포츠계에 충격을 안겼다.


주요 성적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