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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고등학교 축구부 == | | == 중동고등학교 축구부 == |
− | 중동고는 1928년 축구부를 창단하였으며, 197,8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후 잠시 침체기를 겪기도 했으나, 삼성재단의 후원 아래 인조잔디 구장을 구비하는 등 내실을 꾀하면서 다시금 과거의 영광을 조금씩 되찾아 가고있다. 중동고 출신 선수들을 확인하려면 [[:분류:중동고등학교의 선수]]를 클릭할 것. | + | 중동고는 1928년 축구부를 창단하였으며, 197,8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
− | 우리 나라에서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칙아래 경기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갖추고 경기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다.
| + | 이후 잠시 침체기를 겪기도 했으나, 삼성재단의 후원 아래 인조잔디 구장을 구비하는 등 내실을 꾀하면서 다시금 과거의 영광을 조금씩 되찾아 가고있다. |
− | 1921년 제1회 전全조선 축구대회가 개최되고, 이어 중동학원은 1927년 백농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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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규동 선생께서 일제 강점기 민족혼을 살리고자 축구ㆍ농구ㆍ유도부를 창단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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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써 중동의 찬란한 축구 역사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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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 축구의 역사 역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확한 근거 자료가 그리 많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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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밝힐 수밖에 없다. 중동100년학원사에서 밝히는
| + | 중동고 출신 선수들을 확인하려면 [[:분류:중동고등학교의 선수]]를 클릭할 것. |
− | 중동체육사 와는 달리 동문사에서는 다소 경직된 기록위주가 아닌 인물 중심의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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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상과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본인들에게 실례가 될 수 있지만 넓은 아량으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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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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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우리 나라에서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칙아래 경기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갖추고 경기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다. |
| + | 1921년 제1회 전全조선 축구대회가 개최되고, 이어 중동학원은 1927년 백농 최규동 선생께서 일제 강점기 민족혼을 살리고자 축구ㆍ농구ㆍ유도부를 창단함으로써 중동의 찬란한 축구 역사가 시작됐다. |
| + | 중동 축구의 역사 역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확한 근거 자료가 그리 많지 않아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밝힐 수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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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의 중동 축구 | | 초기의 중동 축구 |
− | 한국 축구의 시작은 1920년대 초 외국 선교사들이 각종 구기를 소개, 지도하며 그 | + | 한국 축구의 시작은 1920년대 초 외국 선교사들이 각종 구기를 소개, 지도하며 그발전이 이루어졌는데 중동 축구팀이 창설된 1928년 무렵 당시의 축구계는 평양의 숭실, 서울의 경신 등이 막강한 전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
− |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중동 축구팀이 창설된 1928년 무렵 당시의 축구계는 평양의
| + | 중동 축구는 1928년 조선 신궁대회 예선에서 강호 경신과 대전했다. 이 대회에 처음 출전한 우리 중동은 애석하게도 패하고 말았다. |
− | 숭실, 서울의 경신 등이 막강한 전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 + | 하지만 이 경기가 신예 중동 축구가 서서히 그 기반을 굳혀 나가는 첫 발걸음이 됐다. |
− | 중동 축구는 1928년 조선 신궁대회 예선에서 강호 경신과 대전했다. 이 대회에 | + | 이후 중동 축구는 모든 면에서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착실한 훈련을 통해 많은 발전을 가져와 1934년 조선체육회 창설 15주년 종합경기대회에서는 준우승이라 성적을 올리며 그 영광의 서막을 열었다. |
− | 처음 출전한 우리 중동은 애석하게도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경기가 신예 중동 | + | 1971년 일간스포츠에 따르면 그때의 멤버들은 다음과 같다. |
− | 축구가 서서히 그 기반을 굳혀 나가는 첫 발걸음이 됐다. | + | 골키퍼 윤형섭, 풀백 최창흠ㆍ박명선, 하프백ㆍ최인모ㆍ전지경ㆍ신일근, 포드 강주세ㆍ김진옥ㆍ천갑손ㆍ전흥주 등이다. |
− | 이후 중동 축구는 모든 면에서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착실한 훈련을 통해 많은 | + | 이러한 첫 실적은 한국 축구사에 길이 빛날 중동 축구의 모습을 탄생을 조심스럽게 보여주었고, 1937년에 들어서 6중학 축구연맹전과 경성제대 주최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중동 축구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
− | 발전을 가져와 1934년 조선체육회 창설 15주년 종합경기대회에서는 준우승이라는 | + | 이후 중동 축구는 일제 강점기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1938년 보성전문 주최 제11회 중등대회 준우승, 같은 해 전全조선축구대회 겸 전일본축구 예선 대회에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하고 이듬해 1939년 일본 메이지明治신궁 전국축구대회 |
− | 성적을 올리며 그 영광의 서막을 열었다. | + | 우승을 차지했다. |
− | | + | 우승컵을 안고 경성 역에 도착한 선수들을 전교학생들이 무등을 태워 본교까지행진하고 본교 운동장에서 백농 최규동 선생님께서 황소를 잡아 전교생이 파티 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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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 당시의 진용을 보면 이시동, 박건섭, 이기주, 정형식, 곽정빈, 정인호, 이강열, 이범태, 유명석, 최병섭, 하진용 동문이 활약했다. |
− | | + | 특히 38회 이시동 동문은 졸업 후 와세다早稻田대학의 축구부원으로 활약하며 런던 올림픽 축구대표선수로 출전했었고, 한국 선수로서는 최초로 홍콩 프로팀의 선수로 스카우트 되는 등 초창기 중동 축구의 상징이 됐다. |
− | 1971년 일간스포츠에 따르면 그때의 멤버들은 다음과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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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 골키퍼 윤형섭, 풀백 최창흠ㆍ박명선, 하프백ㆍ최인모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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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지경ㆍ신일근, 포드 강주세ㆍ김진옥ㆍ천갑손ㆍ전흥주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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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러한 첫 실적은 한국 축구사에 길이 빛날 중동 축구의 모습을 탄생을 조심스 | |
− | 럽게 보여주었고, 1937년에 들어서 6중학 축구연맹전과 경성제대 주최 축구대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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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중동 축구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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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후 중동 축구는 일제 강점기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1938년 보성전문 주 | |
− | 최 제11회 중등대회 준우승, 같은 해 전全조선축구대회 겸 전일본축구 예선 대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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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하고 이듬해 1939년 일본 메이지明治신궁 전국축구대회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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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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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승컵을 안고 경성 역에 도착한 선수들을 전교학생들이 무등을 태워 본교까지 | |
− | 행진하고 본교 운동장에서 백농 최규동 선생님께서 황소를 잡아 전교생이 파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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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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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농 선생 따님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선생께서는“다음에는 이 기쁨을 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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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서 파티를 하자”고 했다고 한다. 암울한 일제강점기의 감정을 표출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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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당시의 진용을 보면 이시동, 박건섭, 이기주, 정형식, 곽정빈, 정인호, 이강열, | |
− | 이범태, 유명석, 최병섭, 하진용 동문이 활약했다. | |
− | 특히 38회 이시동 동문은 졸업 후 와세다早稻田대학의 축구부원으로 활약하며 | |
− | 런던 올림픽 축구대표선수로 출전했었고, 한국 선수로서는 최초로 홍콩 프로팀의 | |
− | 선수로 스카우트 되는 등 초창기 중동 축구의 상징이 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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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치신궁대회 중동군의 우승을 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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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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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38회 이기주당시 국가대표 동문도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일본의 유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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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달들과도 친분이 있었던 이기주 동문은 축구뿐만 아니라 주먹으로도 한국 축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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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서 유명했다. 이기주 동문이 한 신문기자와 식사 중 담배 불로 기자의 이마에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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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를 냈다. 이유는 너무 말이 많고 아는 척을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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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중동에서 축구를 하다가 다른 학교로 전학 간 상대 선수를 경기중에 심판 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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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래 축구화로 밟은 일도 있을 정도로 성격이 불같았다. 그의 아들이자 축구부 후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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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4회 이우광 동문도 아버지를 宣?축구도 잘했지만 주먹도 만만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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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메이지明治신궁 축구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중동 축구는 1940년 한국조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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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로 전일본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일본의 사미쓰상업ㆍ도꾸시마상업ㆍ우라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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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ㆍ메이세이상업 등 당시 일본 학생 축구의 최강팀을 차례로 격파하며 전일본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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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권을 차지하는 쾌거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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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국민의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축구로 잠시나마 잊게 해 준 중동 축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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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러한 여세를 몰아 국내에서 열린 조선종합축구대회와 제13회 중등 축구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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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신궁경기 등 전국 단위의 고교 선수권대회에서 보성, 양정, 배재 등 당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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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팀을 모두 물리치고 우승하는 빛나는 전적을 올려 중동 축구의 위상을 한껏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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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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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1940년대 일본의 압정과 전쟁 등으로 우리 나라의 각종 구기는 없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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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 젊은이들의 근로동원, 군사훈련 등으로 인해 축구를 비롯한 모든 체육계가 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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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되는 아픈 시기를 맞아 우리 중동 축구도 지난날의 영화를 뒤로 하고 어둠으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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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앉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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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당시 어려운 시기에 우리 중동 축구를 거쳐 간 수많은 동문들은 중동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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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발전의 토대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축구 발전의 한 축을 맡았던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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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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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한 장비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축구의 특성은 당시 가난했던 민중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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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 큰 호응을 받았으며, 축구 선수에게 필요한 굳센 체력과 강인한 투쟁심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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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의 정서와도 일치했으며, 더불어 중동인의 사자 정신과도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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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는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가슴에 쌓인 민족의 울분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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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청량제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의 희망을 키울 수 있는 싹이었고, 중동 축구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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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자랑스럽게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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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두운 일제 강점기의 터널을 빠져 나온 중동 축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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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운 세상을 맞아 더욱 성숙하고 당찬 모습을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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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기 시작했다. 1945년 열린 해방 경축 종합대회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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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지역 축구대회에서 중동 축구는 강호 배재, 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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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 휘문 등과 함께 기량을 겨뤄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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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39회 이범태, 최병섭, 이강열이상 월북, 신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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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진용 동문들의 실력은 대표선수 이상이었다.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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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회 하진용 동문은 당시 서대문 주먹계에도 널리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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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려져 시합 중에 상대선수가 하진용 동문에게 태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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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다음 일어서서‘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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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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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이렇게 특출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몇몇 선수들이 런던올림픽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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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수로 뽑히지 않자 이강열 동문이 북한에서 열리는 축구시합에 나가자 해서 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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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 올라갔다가 6.25전쟁 때문에 내려오지 못하는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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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일로 인해 국가에서는 이들을 사상불순자로 오해해 중동 출신 축구선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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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많이 스카우트했던 고려대학교에서 중동 출신 축구선수를 한동안 뽑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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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타까운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이로 인해 연세대학교로 진학한 동문들이 많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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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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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서 잠시 한국 축구의 양대 산맥에 대해 살펴본다면 한국 축구계를 짊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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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 온 핵심세력을 연세대와 고려대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세력의 모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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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를 보면 중동을 비롯해 배재ㆍ경신고등학교 출신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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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만 보아도 중동 축구는 한국축구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고 보아도 과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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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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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월북 사건으로 돌아와 이 사건을 계기로 비록 사상불순자로 오해를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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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는 했으나, 역설적으로 중동 축구가 북한 축구역사의 한 부분을 장식하게 된다.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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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 최병섭 동문은 북한 청소년대표코치를, 39회 이범태 동문은 북한축구협회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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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범태 동문의 동생인 44회 이범창 동문 역시 중동 축구 선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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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제가 모두 중동 축구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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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중동 축구는 많은 역경을 이기고 팀을 재정비해 1946년 제1회 전국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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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수권 대회 우승, 서울시 기념대회 우승, 1947년 제2회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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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라는 성적을 올려 해방 후 새롭게 중동 축구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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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후 거침없는 연승 가도를 달린 중동 축구는 1948년 학도체육대회 서울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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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승,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 등의 성적을 거두고 1949년에는 제1회 전국 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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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육대회 우승과 함께 다시 한 번 전국축구선수권대회를 우승해 중동 축구의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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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 실력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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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당시 주축선수로는 42회 오완건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김명환전 모교 축구감독,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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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배, 김돈해, 김포경, 강석영, 김석봉 동문 등이 있었고 또한 그해 1948년 런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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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픽 국가대표선수로 38회 이시동 동문이 출전해 중동 축구를 세계로 알리는데 큰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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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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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히 오완건 동문은 27년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대한축구협회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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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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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김명환 동문은 10여 년간 무보수로 모교를 위해 축구부 감독을 하면서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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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수한 제자들을 배출시키고 모교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1975년과 1976년 전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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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축구 대회를 석권하는 기록을 세웠고, 이후 국민대학교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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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 국민대학교를 정상에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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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 보스톤마라톤 제패 기념 축구대회에서 경신을 2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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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중동 축구는 같은 해 6월 20일 전국학도호국단대회가 6.25전쟁 발발로 중단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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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 전쟁 중에 펼쳐진 약간의 대회에 참가는 했으나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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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처에 의해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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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전쟁으로 인해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44회 신동호 동문은 당시 공격수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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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명이 오토바이일 정도로 대표선수 이상의 기량이었으나 6.25전쟁 중 전투에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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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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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 축구는 6.25전쟁 중에 유니폼에 대한 일화가 있다. 원래 중동의 유니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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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의 노란색으로 6.25전쟁 전부터 지금까지 착용하고 있으나, 6.25전쟁이 나자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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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란색 원단을 구하지 못해 흰색 상의와 청색 하의 유니폼을 착용한 적이 있었다.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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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교 학생들은 중동의 노란색 유니폼만 보아도 존경의 대상이 될 만큼 노란색 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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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폼은 누구나 중동 축구임을 알 수 있을 만큼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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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 축구는 6.25전쟁 전에 이룩한 성적에 비해서는 약간의 침체기를 겪었다. | + | 어두운 일제 강점기의 터널을 빠져 나온 중동 축구는 새로운 세상을 맞아 더욱 성숙하고 당찬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
− | 그러나 1954년 1월 한국 국가대표팀의 동남아 원정 당시 본교 48회 정형식, 이기주,
| + | 1945년 열린 해방 경축 종합대회인 5개 지역 축구대회에서 중동 축구는 강호 배재,보성,중앙,휘문 등과 함께 기량을 겨뤄 우승을 차지했다. |
− | 김영일 동문 등이 활약해 중동 축구의 위상은 계속 이어졌다.
| + | 당시 39회 이범태, 최병섭 동문들의 실력은 대표선수 이상이었다. |
− | 걋?해 중동 축구는 그간의 부진을 극복하고 7월에 거행된 전국축구선수권대
| + | 1946년 제1회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우승, 서울시 기념대회 우승, 1947년 제2회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우승이라는 성적을 올려 해방 후 새롭게 중동 축구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
− | 회에서 영예의 우승을 차지했으며, 서울시선수권대회 준우승 등 다시 한 번 도약을
| + | 이후 거침없는 연승 가도를 달린 중동 축구는 1948년 학도체육대회 서울예선 우승,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 등의 성적을 거두고 1949년에는 제1회 전국 학도체육대회 우승과 함께 다시 한 번 전국축구선수권대회를 우승해 |
− | 시작하며 빛나는 중동 축구인을 배출하기 시작한다.
| + | 중동 축구의 놀라운 실력을 입증했다. |
| + | 그 당시 주축선수로는 42회 오완건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김명환전 모교 축구감독, 김형배, 김돈해, 김포경, 강석영, 김석봉 동문 등이 있었고 또한 그해 1948년 런던올림픽 국가대표선수로 38회 이시동 동문이 출전해 |
| + | 중동 축구를 세계로 알리는데 큰 몫을 했다. |
| + | 특히 오완건 동문은 27년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대한축구협회의 역사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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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원래 중동의 유니폼은 전통의 노란색으로 6.25전쟁 전부터 지금까지 착용하고 있으나, 6.25전쟁이 나자 노란색 원단을 구하지 못해 흰색 상의와 청색 하의 유니폼을 착용한 적이 있었다. |
| + | 타학교 학생들은 중동의 노란색 유니폼만 보아도 존경의 대상이 될 만큼 노란색 유니폼은 누구나 중동 축구임을 알 수 있을 만큼 유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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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청룡기 전국 고교 선수권 대회에서 48회 이우현전 MBC | + | 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청룡기 전국 고교 선수권 대회에서 48회 이우현전 MBC 해설위원ㆍ전 국가대표, 장충준전 국회의원, 장대덕전 모교 축구OB 회장, 김상진ㆍ한영기ㆍ고흥균ㆍ박귀상ㆍ엄경진ㆍ전용덕이상 전 국가대표, 이만우, 심재완 동문 등이 |
− | 해설위원ㆍ전 국가대표, 장충준전 국회의원, 장대덕전 모교 축구OB 회장, 김상진ㆍ한영기ㆍ고 | + | 활약해 우승을 차지했다. |
− | 흥균ㆍ박귀상ㆍ엄경진ㆍ전용덕이상 전 국가대표, 이만우, 심재완 동문 등이 활약해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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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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