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뀜

25 바이트 추가됨 ,  2011년 12월 18일 (일) 16:28
잔글
15번째 줄: 15번째 줄:  
제 2대 대표이사였던 [[전형두]]와 초대 감독 [[박항서]]의 알력 다툼이 시즌 종료 후 전형두와 박항서의 연이은 사임으로 이어졌고, 따라서 팀에 위기가 찾아왔다. 전형두를 이어 제 3대 대표이사로 선임된 도의원 김영조는 [[조광래]] 감독을 선임하며 감독 문제를 해결하였고, 구단을 안정화하는데 주력하였다. 이어서 구단을 성공 가도로 이끌 수 있는 전문 경영인의 영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고, 경영난과 1백억 원이 넘는 적자에 시달리던 스포츠서울을 과감한 마케팅 전략을 통해 가히 환골탈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변모시켜놓은 김영만 대표이사가 이사진의 만장일치를 통해 후임 대표이사로 선임되었다.
 
제 2대 대표이사였던 [[전형두]]와 초대 감독 [[박항서]]의 알력 다툼이 시즌 종료 후 전형두와 박항서의 연이은 사임으로 이어졌고, 따라서 팀에 위기가 찾아왔다. 전형두를 이어 제 3대 대표이사로 선임된 도의원 김영조는 [[조광래]] 감독을 선임하며 감독 문제를 해결하였고, 구단을 안정화하는데 주력하였다. 이어서 구단을 성공 가도로 이끌 수 있는 전문 경영인의 영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고, 경영난과 1백억 원이 넘는 적자에 시달리던 스포츠서울을 과감한 마케팅 전략을 통해 가히 환골탈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변모시켜놓은 김영만 대표이사가 이사진의 만장일치를 통해 후임 대표이사로 선임되었다.
   −
2008시즌 [[창원시]] 중심가 이마트 외벽에 큰 경기 홍보 통천이 걸린 것부터 시작해서 경남의 프런트는 적극적 마케팅으로 최선을 다했고, 거기에 조광래 감독의 빠른 템포의 기술축구가 맞물려 이 때부터 경남 축구의 중흥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뒤 공격적인 홍보를 통해 지역 기업의 [[메세나]] 후원 참여, 그리고 각 지자체 대표상품이나 사립대학 등 다양한 스폰서를 끌어들여 재정을 탄탄하게 하였고, 팬들과 함께 노력하여 2010시즌부터 [[창원축구센터]]를 무상 임대하고, 엠블럼과 클럽 로고송을 교체하여 팀 이미지를 쇄신하는 등 팀을 급성장시켰고, 안정된 궤도에 올려놓았다. 당시 프런트 - 감독 - 팬의 삼박자가 척척 들어맞은 경남은 2008시즌 [[대한민국 FA컵]] 준우승, 2009시즌 후반의 놀라운 경기력, 2010시즌 창단 첫 리그 1위 기록 및 [[K리그 챔피언십]]진출 등 성적도 안정권에 들어왔다.
+
2008시즌 [[창원시]] 중심가 이마트 외벽에 큰 경기 홍보 통천이 걸린 것부터 시작해서 경남의 프런트는 적극적 마케팅으로 최선을 다했고, 거기에 조광래 감독의 빠른 템포의 기술축구가 맞물려 이 때부터 경남 축구의 중흥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뒤 공격적인 홍보를 통해 지역 기업의 [[메세나]] 후원 참여, 그리고 각 지자체 대표상품이나 사립대학 등 다양한 스폰서를 끌어들여 재정을 탄탄하게 하였다. 또한, 팬들과 함께 노력하여 2010시즌부터 [[창원축구센터]]를 무상 임대하고, 엠블럼과 클럽 로고송을 교체하여 팀 이미지를 쇄신하는 등 팀을 급성장시켰고, 그 성장력을 안정된 궤도에 올려놓았다. 당시 프런트 - 감독 - 팬의 삼박자가 척척 들어맞은 경남은 2008시즌 [[대한민국 FA컵]] 준우승, 2009시즌 후반의 놀라운 경기력, 2010시즌 창단 첫 리그 1위 기록 및 [[K리그 챔피언십]]진출 등 성적도 안정권에 들어왔다.
    
하지만 2010년 중반 조광래 감독이 축협의 병맛행정을 맛보러 [[대한민국 축구 국가 대표팀|국가대표팀]]으로 떠난 후에도, 조광래 감독을 구단 고문으로 위촉했고, 그 덕분에 2011시즌에도 창원 축구센터를 자주 찾는 조광래 감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2010년 중반 조광래 감독이 축협의 병맛행정을 맛보러 [[대한민국 축구 국가 대표팀|국가대표팀]]으로 떠난 후에도, 조광래 감독을 구단 고문으로 위촉했고, 그 덕분에 2011시즌에도 창원 축구센터를 자주 찾는 조광래 감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편집

3,5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