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준
222.232.121.133 (토론)님의 2017년 1월 5일 (목) 00:01 판
김덕준(1918 ~ 1987)은 축구 선수 이자 축구 지도자이다.
유년 시절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6살 때부터 캐나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축구를 즐겼다고 한다. 이후 함흥 영생중, 연희전문을 졸업할 때 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영생중 시절부터 함흥 대표로 서울 원정을 올 정도로 지명도가 있었으며, 연희전문에 진학한 뒤에는 평양 축구단 멤버이자 전경성축구단 (조선대표팀)에 선발되기도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포워드였다고 한다. 광복 후에는 1945년 개성 대표로 참가했던 것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심판 공부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축구인 생활
1952년 김화집, 김성간, 배종호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국제 심판이 되어 1965년까지 활동하였으며, 심판직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맡아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후 1963년 창단한 대한석탄공사 축구단 코치를 맡아 활약한 것을 마지막으로 축구계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그 뒤로는 독일 체류 시절 유소년 축구 보급 활동을 목도했던 것을 되새겨, '일요축구교실'을 만들어 1980년대까지 어린이 축구 육성에 힘쓰며 여생을 보냈다.[1] 이러한 공로에 1981년 대한민국 정부는 체육상 공로부문을 김덕준 씨에게 수여하기도 하였다.
에피소드
- 심판직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이러했다고 한다. 연희전문 시절 일본 측의 초청으로 일본 원정을 떠났던바 이 때 일본 주심의 실수로 패배한 경기가 있었다고. 이후 이 경기에서 패배한게 분하다 못해 한으로 남았던바, 제대로 된 심판이 되겠다는 결심이 서셨다고 한다.
- 심판직을 수행할 당시 대쪽같은 판정으로 이름을 날리셨다. 하지만 당시는 심판의 권위가 제대로 서질 않았던 시기라 잦은 선수들의 항의 및 관계자들의 폭언 및 폭행까지 받아내는등 온갖 고생을 하셨다고.. 압권은 김창룡 당시 특무부대장과의 일화였다. 당시 군축구대회에서 특무대는 모부대를 상대로 5:0 완승을 눈앞에 두고있던 찰나, 경기 종료 5분을 남기고 해가 져버리는 통에 경기는 무효 선언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는 야간조명 시설이 전무하던 시절이라, 해가 지면 자동 게임 종료, 다음날 재경기가 치루어졌다.) 이를 안 김창룡은 노발대발하며, 경기가 벌어지던 장소 바로 옆에 위치했던 군부대에 차량을 모조리 징발했고 차량들을 운동장에 도열, 라이트를 켜게하여 운동장을 밝히고 '이제 조명이 생겼으니 경기를 속개하라'는 엄명(?)을 내렸는데... 하지만 김덕준 주심은 규정상 경기는 무효 선언이 되어야 한다고 버텼고, 김창룡에게 밉보인 당시 그는 김창룡의 부하들에게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다행히 특무대 축구단 선수이자 김덕준 씨의 연세대 후배였던 김지성 씨가 부랴부랴 나서 구타를 말렸고, 그 틈을 타 김덕준 주심은 담벼락을 넘어 도망을 쳐야만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