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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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ma (토론 | 기여)님의 2011년 8월 11일 (목) 19:50 판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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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시절의 이관우

이관우(李官雨, 1978년 2월 25일 ~ )는 K리그 대전 시티즌,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활약한 선수로, 포지션은 미드필더이다.


프로필

이름 : 이관우

생년월일 : 1978년 2월 25일

포지션 : 미드필더

유스팀 : 한양대학교

대표 경력 :

2008 동아시아연맹 축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2003 동아시아축구대회 국가대표
2003 아시안컵 예선 국가대표
2000.02 북중미 골드컵 국가대표
1999 시드니 올림픽 예선 국가대표
1996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 대표
1997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대표

K리그 경력

소속팀 연도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자책
대전 시티즌 2000 12 9 1 1 2 - -
대전 시티즌 2001 12 8 6 4 2 0 0
대전 시티즌 2002 19 8 2 1 6 0 0
대전 시티즌 2003 38 30 4 5 2 5 0
대전 시티즌 2004 29 19 5 2 8 0 0
대전 시티즌 2005 32 10 4 5 9 0 0
대전 시티즌 2006 23 12 3 3 2 0 0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6 15 7 2 4 2 0 0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7 35 23 4 5 2 0 0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8 28 28 2 3 3 0 0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9 3 2 0 0 1 - -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0 1 1 - - - - -
통산(K리그) - 246 156 30 30 42 0 0

K리그 통산기록은 리그컵기록 포함. 2011년 3월 1일 기준.



유소년 시절

서울에서 태어난 이관우는 중화초등학교, 한양중학교, 한양공업고등학교, 한양대학교를 거쳤다. 한양공고 시절 이관우는 뛰어난 축구센스와 발재간을 바탕으로 한양공고를 제50회 전국중고축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끌었고, 이관우는 이 대회에서 최우수 선수상을 받는 영광을 얻었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이관우는 96년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에 참가했고, 97년 말레이시아에서 벌어진 20세 이하 세계 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에 주전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이 대회에서 프랑스의 티에리 앙리, 다비드 트레제게에 전반 10분만에 3골을 허용하는 등 탈탈 털린 끝에 2-4로 졌고, 브라질과의 경기에서는 아다일톤에게 무려 6골을 허용하는 굴욕속에 3-10으로 패배, 처참하게 탈락했다. [1] [2] 이 경기에서 이관우는 0-6으로 뒤진 상황에서 통렬한 프리킥 골을 성공하며 잇단 삽질에 답답해하던 축구팬들의 맘을 달래주었다. 한양대학교에 진학해서도 이관우는 맹활약했고 이를 바탕으로 프로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 [3]

대전 시절

이관우가 대전으로 입단하게 되는데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한양대학교 시절 이관우는 J리그 아비스파 후쿠오카와 당시 계약금 2천만엔(약 2억4천만원), 2000년 연봉 4천800만엔(약 5억 7천만원)에 이미 입단계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하지만, 계약 전에 드래프트 신청서를 넣은것이 문제였다. 당시 최하위 팀이었던 대전은 당연히 이관우를 지명했고, 이관우는 국내계약이 우선시하는 프로규정에 따라 이중계약이 되어 선수생활에 위기를 맞게 된 것이었다. 다행히 이관우가 후쿠오카의 이적을 철회함에 따라 이관우는 대전에서 뛰게 되었고, 이관우는 2000년 K리그 무대를 밟게 되었다. 2000년 12경기 1골 1도움으로 연착륙한 이관우는 2001년 12경기 6골 4도움을 기록하며 대전의 사상 첫 FA컵 우승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대전시절 이관우는 직접 공격포인트를 올리는 빈도는 적었지만, 탁월한 시야를 바탕으로 다른 동료선수들에게 볼을 공급하게 하면서, 이관우의 진가를 증명했다. 세트피스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이면서 프리킥이나 코너킥은 이관우가 전담키커였을 정도로 프리킥 정확성도 높았다. 이관우는 2006년 전반기까지 165경기에 출전 25골 21도움을 기록하며 대전에 없어서는 안될 스타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수원 시절

수원 시절의 이관우

2006년 여름이적시장 대전팬들에게 충격적인 뉴스가 접해졌다. 이관우의 수원이적이 확정되었다는 것이었다. 사실은 이 이적건도 대전구단의 이해관계가 얽힌 트레이드였다. 당시 이관우는 2006 시즌이 끝나면 FA자격을 취득하게 되어있었고, 당연히 이관우는 해외진출을 노린다는 복안이었다. 하지만, 돈 한푼 없이 이관우를 보낼 수 없었던 대전은 국내 타 구단에게 이관우의 이적을 타진했다. 나중에 사장이 교체되면서 이 일은 없던 일이 되는가 싶었지만, 이관우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큰 상처를 받았고, 결국 구단에게 이적을 요청하면서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대전팬들은 이관우의 당시 등번호였던 8번을 쓴 게이트기를 머리로 들어올리며 이관우의 이적을 반대했지만, 결국 이관우는 2006년 7월 22일 수원으로 확정되었다.

수원으로 이적 후 7월 26일 FC GS와의 컵대회에서 선발 출전한 이관우는 무난한 활약으로 데뷔전을 치렀고, 이후 2006년 8월 24일 FC GS전에서 멋진 시저스킥으로 팀의 동점골을 안겨주었다. 이관우의 이같은 활약으로 전반기 하위권으로 처져있던 수원은 13경기 무패를 달리며 대약진.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플레이오프에서도 포항 스틸러스에 승리하며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하지만, 수원은 챔피언 결정전에서 김두현, 모따, 네아가의 맹활약에 우승컵을 내줬고, FA컵 결승에서도 전남 드래곤즈에게 패배하며 무관의 제왕에 머물러야만 했다.

2007년에도 이관우는 맹활약을 보여주며 35경기 4골 5도움을 기록했지만, 팀은 단 하나의 우승컵도 들어올리지 못했다. 2008년 이관우는 28경기에 출전 2골 3도움을 기록했고, 넓은 행동반경을 바탕으로 공격진들에게 활로를 열어주기 시작했다. 결국 이관우의 활약으로 수원은 2008년 리그컵K리그를 동시에 재패하며 프로생활 첫 정규리그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하지만 2009년 이관우는 부상으로 고작 3경기 출장에 그치더니, 2010년에는 1경기만 출장하고 무릎부상으로 재활에만 매달려야 했다. 그 사이 감독은 차범근 감독에서 윤성효 감독으로 바뀌어 있었고, 윤성효 감독이 단행한 세대교체의 바람은 이관우를 비껴가지 못했다. 결국 FA 자유계약으로 풀린 이관우는 뛸 팀을 모색했지만, 높은 연봉과 부상 위험성을 알고있는 타 구단에게 메리트를 주지 못하였고 결국 아무팀과 계약하지 못한채 이적시장을 마치고 말았다.

현재 근황

현재 동탄 부근에서 이관우의 낙지 한마당이라는 낙지집을 운영하고 있다. 입소문이 잘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편이라고 한다. 정작 본인은 선수생활에 욕심이 나는 것 같기도.


에피소드

  • 대전시절 팀 동료였던 김은중과 함께 대전을 이끌었다. 당시 이관우는 서글서글한 외모와 뛰어난 축구 실력을 바탕으로 여자팬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그 여자팬들이 지금의 퍼플크루가 되는데에는 이관우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 이관우는 유독 FC GS와의 경기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수원에서 기록한 공격포인트의 대부분이 GS를 상대로 넣은 골이다.
  • 이관우는 드물게 대전과 수원에서 모두 레전드로 남아있는 선수다. 대전에서 뛸 당시에는 해외진출의 유혹을 뿌리치고 대전에 7년동안 있었던 것이 대전팬들로 하여금 레전드로 불리게 하는 요인이 되었고, 수원에서는 2006년 8월 24일 FC GS전에서 멋진 시저스킥으로 팀의 동점골을 넣고 거수경례 세레모니를 보여주며 수원팬들의 호감을 얻었다. 이에 수원팬들은 입단한지 2개월 만에 이관우 콜을 만들었고, 이관우도 이에 멋진 플레이로 보답하며 대전과 수원에서 모두 좋은 이미지의 선수로 남아있다. 이제 GS만 안가면 된다
  • 청대에서의 활약으로 이관우는 포르투갈 프로팀 (스포르팅 리스본)에서 입단 제의를 받게 되었었다. 그러나 이회택 감독을 따라 한양대로 가게 되었는데 나중에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면서, 재활에만 3년을 매달리게 된다. 당시 이회택 감독은 '내가 선수 앞길을 망쳤다' 라면서 한탄했었다고. 그 후 2003년에는 포르투갈 벤피카에서 오퍼를 받았지만 '대전에서 좀 더 뛰고 싶다' 라면서 거절하였다 한다.

참조

  1. 많은 축구팬들은 쿠칭참사라 부르고 있다.
  2. 여담이지만 그 당시 선제골을 어시스트한 비니시우스는 06년 울산에서 활약한 그 비니시우스이며, 6골을 넣으며 한국진영을 폭격했던 아다일톤은 현재 루마니아 리그의 FC Vaslu이라는 팀에서 뛰고있다.
  3. 당시 브라질 감독은 10골을 넣은 공격진에 칭찬하기 보다, 3골을 실점한 수비진들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브라질은 16강전에서 벨기에를 맞아 10:0으로 승리하면서 우리나라는 그나마 세골이나 넣었다고 위안 삼을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