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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수단 ==
 
== 선수단 ==
월간축구 1973년 1월호에 게재된 [[김성간]] 씨 인터뷰를 토대로 당대 무오단 선수들의 이름을 확인하면 다음과 같다. 후원자 겸 플레이어였던 유정필, [[숭실중학]] 축구부 코치를 맡아 [[김영근 (1908년)]]을 키워낸 것으로 알려진 [[차재일]], [[정국진]] 씨의 부친인 정원선 씨를 비롯해 김태술, 이병학, 이병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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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축구 1973년 1월호에 게재된 [[김성간]] 씨 인터뷰를 토대로 당대 무오단 선수들의 이름을 확인하면 다음과 같다. 후원자 겸 플레이어였던 유정필, [[숭실중학]] 축구부 코치를 맡아 [[김영근 (1908년)]]을 키워낸 것으로 알려진 [[차재일]], [[정국진]] 씨의 부친인 정원선 씨, [[정용수]] 씨의 형인 정용호를 비롯해 김태술, 이병학, 이병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2017년 12월 22일 (금) 09:40 판

무오단(戊午團)은 1918년(무오년) 평양에서 설립된 체육단체이다.


무오단의 탄생과 해체

1917년 창단한 불교청년회를 비롯해, 일제강점기 조선내 근대스포츠 보급에 앞장서고 있었던 체육단체 활동들은 서울에 편중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과 지역적 라이벌 의식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던 평양 청년들은, 1918년 단장 이필상 씨와 유정필의 주도로[1] 후원으로 무오단을 창단하게 되었다. 창단 연도인 1918년이 무오년이라 이름도 무오단으로 칭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후 1921년 설립된 기독교청년회와 더불어 평안도 지역의 양대 체육 단체로 자리매김하며 명성을 떨쳤다. 1925년에는 관서체육회의 설립에 기여하였고 전조선축구대회에는 무오단과 무오청년회라는 이름으로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특히 서울 불교청년회 축구단 vs 평양 무오단은 한국축구 역사상 최초로 라이벌 구도를 이루며, 전조선축구대회에서 명승부를 펼쳐보였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무오단은 재정적 어려움을 이유로 활동이 뜸해졌고, 1930년 봉천 해외 원정을 추진하였으나 신의주에서 원정비를 전부 도난맞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33년을 전후해 해산하고 말았다. 하지만 무오단의 주요 멤버는 1933년 1월 15일 평양의 체육 인사들이 평양축구단을 발족한 때에 맞추어 대거 멤버 구성에 참가, 평양축구단의 기틀을 만들었다.


선수단

월간축구 1973년 1월호에 게재된 김성간 씨 인터뷰를 토대로 당대 무오단 선수들의 이름을 확인하면 다음과 같다. 후원자 겸 플레이어였던 유정필, 숭실중학 축구부 코치를 맡아 김영근 (1908년)을 키워낸 것으로 알려진 차재일, 정국진 씨의 부친인 정원선 씨, 정용수 씨의 형인 정용호를 비롯해 김태술, 이병학, 이병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역대 성적


같이 보기


참고

  1. 당시 이필상 씨는 약재상을 운영하며 재산이 많았고, 유정필 씨도 재력가였다고 한다. 특히 유정필 씨는 후원자 역할에 그치지 않고, 코치 및 스타 플레이어까지 도맡으며 무오단의 핵심 전력으로 활약하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