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도 춘계실업축구연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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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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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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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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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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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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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접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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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춘계실업축구연맹전은 1971년에 열린 실업축구대회이다.
개요
1971년 4월부터 지방 4개 도시(진해, 진주, 대구, 군산)에서 조별 예선을 치렀으며, 동년 6월 24일부터 7월 4일까지 효창구장에서 준결승 리그 및 결승 리그가 열린 실업 축구 대회이다. 1970년 춘계실업축구연맹전과 달리, 금융단 축구협의회 산하팀, 군인팀, 실업팀 등 총 18개 팀이 참가하여 대회 규모가 한층 더 커졌다. 다만 본 대회가 종료되고 불과 1주일 뒤에, 군ㆍ실업ㆍ금융 올스타전이 치러졌기 때문에 71 춘계실업축구연맹전 열기가 다소 뜨뜻미지근하였으며, 준결승 리그 도중 경기 포기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문제점이 드러난 대회로 기록되었다.
준결승 참가팀
대회 방식
지방 4개 도시에서 조별 예선을 치르고 올라온, 총 8개 팀을 다시 2개 조로 나뉘어 준결승 리그를 진행하였다. 이후 준결승 리그 각 조 상위 2개 팀이 결승에 진출, 총 4개 팀이 결승 리그를 치러 우승팀을 정하였다. 당시 승점 계산은 승리 2점, 무승부 1점, 패배 0점이었다.
대회 결과
준결승 리그
준결승 리그 A조
순위 |
팀 |
경기수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골득실 |
승점
|
1 |
주택은행 |
3 |
2 |
1 |
0 |
4 |
1 |
+1 |
5
|
2 |
제일모직 |
3 |
0 |
3 |
0 |
2 |
2 |
+0 |
4
|
3 |
국민은행 |
3 |
1 |
1 |
1 |
2 |
3 |
-1 |
3
|
4 |
한일은행 |
3 |
0 |
1 |
2 |
0 |
2 |
-2 |
1
|
준결승 리그 B조
순위 |
팀 |
경기수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골득실 |
승점
|
1 |
외환은행 |
3 |
1 |
2 |
0 |
3 |
2 |
+1 |
4
|
2 |
신탁은행 |
3 |
1 |
2 |
0 |
1 |
0 |
+1 |
4
|
3 |
해병대 |
3 |
1 |
1 |
1 |
2 |
3 |
-1 |
3
|
4 |
조흥은행 |
3 |
0 |
1 |
2 |
0 |
1 |
-1 |
1
|
결승 리그
순위 |
팀 |
경기수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골득실 |
승점
|
1 |
신탁은행 |
3 |
1 |
2 |
0 |
3 |
2 |
+1 |
4
|
2 |
주택은행 |
3 |
0 |
3 |
0 |
2 |
2 |
0 |
3
|
2 |
외환은행 |
3 |
1 |
1 |
1 |
1 |
1 |
0 |
3
|
4 |
제일모직 |
3 |
0 |
2 |
1 |
2 |
3 |
-1 |
2
|
에피소드
- 준결승 리그 B조, 마지막 라운드는 1위팀과 2위팀인 신탁은행 vs 외환은행 (둘다 승점 3점)의 경기였고, 이어 3위팀과 4위팀 경기인 해병대 vs 조흥은행 (둘다 승점 1점)의 경기가 치러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신탁은행과 외환은행은 서로 비기기만 해도 승점 4점이 되기 때문에, 해병대가 조흥은행을 이긴다한들 승점이 1+2=3점밖에 안되는 상황임을 인지하고 고의로 0:0 무승부를 만들며 경기를 마쳤다. 이에 조흥은행 함흥철 코치는 강력 반발하며, '어차피 경기해봐야 무의미하니 기권하겠다' 고 선언, 결국 해병대는 기권승을 거뒀음에도 3점에 그쳐 결승 리그 진출에 실패하였다. 당시 효창운동장을 찾은 1,000여명의 관중들은 이런 고의 비기기와 기권 광경을 지켜보다 못해 폭발, 환불 소동을 일으키며 본부석에 몰려들어 소란을 빚었던바 있다.
- 결국 이 사단이 끝난 다음날, 한국실업축구연맹 측은 기권패를 선언한 함흥철 코치에게 1년 자격 정지의 징계를, 이어 고의 비기기의 주역(?)이었던 외환은행의 [[박수일] 선수에게는 경고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0:0 고의 비기기를 지시한 신탁은행과 외환은행 코치들에게는 별다른 징계가 내려지지 않아 말이 많았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