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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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고등학교(中東高等學校, Joong Dong High School. 이하 중동고)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위치한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이다.

축구위키인 풋케위키에서 중동고라 함은 중동고등학교 축구부를 의미한다.


중동고등학교

1906년 4월 2일 오규신, 유광렬, 김원배 선생이 한어, 산술 양과의 야학을 설립하면서 첫 출발하였으며, 1907년 1월 22일 중동야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09년 5월 10일 중동학교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16년 4월 5일 주학을 병설하며 3과 체제로 재편하였다. 1919년 1월 11일에는 사립중동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중동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6.25 동란기 교사가 전소되는 등 피해를 입었으나, 피난지인 부산에서도 임시 야학교를 개설하는등 명맥을 이어갔으며, 1951년 8월 25일 중동고등학교 인가를 받은뒤 서울 종로 수송동에 신교사를 재건하기에 이른다. 이후 1982년 10월 23일 야간고등학교를 폐지, 중동중, 중동고 모두 1984년 3월 1일 강남구 신축교사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교훈은 ‘정직(正直), 근면(勤勉), 청결(淸潔)’이며, 교목은 은행나무, 교화는 목련이다.


중동고등학교 축구부

중동고는 1928년 축구부를 창단하였으며, 197,8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후 잠시 침체기를 겪기도 했으나, 삼성재단의 후원 아래 인조잔디 구장을 구비하는 등 내실을 꾀하면서 다시금 과거의 영광을 조금씩 되찾아 가고있다. 중동고 출신 선수들을 확인하려면 분류:중동고등학교의 선수를 클릭할 것. 우리 나라에서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칙아래 경기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갖추고 경기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다. 1921년 제1회 전全조선 축구대회가 개최되고, 이어 중동학원은 1927년 백농 최 규동 선생께서 일제 강점기 민족혼을 살리고자 축구ㆍ농구ㆍ유도부를 창단함으로 써 중동의 찬란한 축구 역사가 시작됐다. 중동 축구의 역사 역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확한 근거 자료가 그리 많지 않

아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밝힐 수밖에 없다. 중동100년학원사에서 밝히는 중동체육사 와는 달리 동문사에서는 다소 경직된 기록위주가 아닌 인물 중심의 활 약상과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본인들에게 실례가 될 수 있지만 넓은 아량으로 이 해해 주기를 바란다.


초기의 중동 축구 한국 축구의 시작은 1920년대 초 외국 선교사들이 각종 구기를 소개, 지도하며 그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중동 축구팀이 창설된 1928년 무렵 당시의 축구계는 평양의 숭실, 서울의 경신 등이 막강한 전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중동 축구는 1928년 조선 신궁대회 예선에서 강호 경신과 대전했다. 이 대회에 처음 출전한 우리 중동은 애석하게도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경기가 신예 중동 축구가 서서히 그 기반을 굳혀 나가는 첫 발걸음이 됐다. 이후 중동 축구는 모든 면에서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착실한 훈련을 통해 많은 발전을 가져와 1934년 조선체육회 창설 15주년 종합경기대회에서는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올리며 그 영광의 서막을 열었다.


1971년 일간스포츠에 따르면 그때의 멤버들은 다음과 같

다. 골키퍼 윤형섭, 풀백 최창흠ㆍ박명선, 하프백ㆍ최인모ㆍ 전지경ㆍ신일근, 포드 강주세ㆍ김진옥ㆍ천갑손ㆍ전흥주 등이다. 이러한 첫 실적은 한국 축구사에 길이 빛날 중동 축구의 모습을 탄생을 조심스 럽게 보여주었고, 1937년에 들어서 6중학 축구연맹전과 경성제대 주최 축구대회에 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중동 축구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후 중동 축구는 일제 강점기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1938년 보성전문 주 최 제11회 중등대회 준우승, 같은 해 전全조선축구대회 겸 전일본축구 예선 대회에 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하고 이듬해 1939년 일본 메이지明治신궁 전국축구대회 우승 을 차지했다. 우승컵을 안고 경성 역에 도착한 선수들을 전교학생들이 무등을 태워 본교까지 행진하고 본교 운동장에서 백농 최규동 선생님께서 황소를 잡아 전교생이 파티를 했다고 한다. 백농 선생 따님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선생께서는“다음에는 이 기쁨을 백두산 에서 파티를 하자”고 했다고 한다. 암울한 일제강점기의 감정을 표출한 사건이었다. 그 당시의 진용을 보면 이시동, 박건섭, 이기주, 정형식, 곽정빈, 정인호, 이강열, 이범태, 유명석, 최병섭, 하진용 동문이 활약했다. 특히 38회 이시동 동문은 졸업 후 와세다早稻田대학의 축구부원으로 활약하며 런던 올림픽 축구대표선수로 출전했었고, 한국 선수로서는 최초로 홍콩 프로팀의 선수로 스카우트 되는 등 초창기 중동 축구의 상징이 됐다.


명치신궁대회 중동군의 우승을 알리는 신문기사

또한 38회 이기주당시 국가대표 동문도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일본의 유명한 건달들과도 친분이 있었던 이기주 동문은 축구뿐만 아니라 주먹으로도 한국 축구계 에서 유명했다. 이기주 동문이 한 신문기자와 식사 중 담배 불로 기자의 이마에 상 처를 냈다. 이유는 너무 말이 많고 아는 척을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또 중동에서 축구를 하다가 다른 학교로 전학 간 상대 선수를 경기중에 심판 몰 래 축구화로 밟은 일도 있을 정도로 성격이 불같았다. 그의 아들이자 축구부 후배인 74회 이우광 동문도 아버지를 宣?축구도 잘했지만 주먹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 메이지明治신궁 축구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중동 축구는 1940년 한국조선대 표로 전일본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일본의 사미쓰상업ㆍ도꾸시마상업ㆍ우라와중 학ㆍ메이세이상업 등 당시 일본 학생 축구의 최강팀을 차례로 격파하며 전일본 선 수권을 차지하는 쾌거를 올렸다. 우리 국민의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축구로 잠시나마 잊게 해 준 중동 축구는 이러한 여세를 몰아 국내에서 열린 조선종합축구대회와 제13회 중등 축구대회, 조선신궁경기 등 전국 단위의 고교 선수권대회에서 보성, 양정, 배재 등 당대의 강팀을 모두 물리치고 우승하는 빛나는 전적을 올려 중동 축구의 위상을 한껏 드 높였다. 그러나 1940년대 일본의 압정과 전쟁 등으로 우리 나라의 각종 구기는 없어지 고 젊은이들의 근로동원, 군사훈련 등으로 인해 축구를 비롯한 모든 체육계가 침체 되는 아픈 시기를 맞아 우리 중동 축구도 지난날의 영화를 뒤로 하고 어둠으로 가라 앉게 됐다. 하지만 당시 어려운 시기에 우리 중동 축구를 거쳐 간 수많은 동문들은 중동 축 구발전의 토대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축구 발전의 한 축을 맡았던 사실 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특별한 장비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축구의 특성은 당시 가난했던 민중들에 게 큰 호응을 받았으며, 축구 선수에게 필요한 굳센 체력과 강인한 투쟁심은 우리 국민의 정서와도 일치했으며, 더불어 중동인의 사자 정신과도 일치했다. 축구는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가슴에 쌓인 민족의 울분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 한 청량제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의 희망을 키울 수 있는 싹이었고, 중동 축구는 그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자랑스럽게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두운 일제 강점기의 터널을 빠져 나온 중동 축구는 새로운 세상을 맞아 더욱 성숙하고 당찬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1945년 열린 해방 경축 종합대회인 5 개 지역 축구대회에서 중동 축구는 강호 배재, 보성, 중앙, 휘문 등과 함께 기량을 겨뤄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39회 이범태, 최병섭, 이강열이상 월북, 신현수, 하진용 동문들의 실력은 대표선수 이상이었다. 특히 38회 하진용 동문은 당시 서대문 주먹계에도 널리 알 려져 시합 중에 상대선수가 하진용 동문에게 태클을 한 다음 일어서서‘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렇게 특출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몇몇 선수들이 런던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로 뽑히지 않자 이강열 동문이 북한에서 열리는 축구시합에 나가자 해서 북으 로 올라갔다가 6.25전쟁 때문에 내려오지 못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일로 인해 국가에서는 이들을 사상불순자로 오해해 중동 출신 축구선수를 가장 많이 스카우트했던 고려대학교에서 중동 출신 축구선수를 한동안 뽑지 않는 안타까운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이로 인해 연세대학교로 진학한 동문들이 많다고 한다.


여기서 잠시 한국 축구의 양대 산맥에 대해 살펴본다면 한국 축구계를 짊어지 고 온 핵심세력을 연세대와 고려대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세력의 모태 를 보면 중동을 비롯해 배재ㆍ경신고등학교 출신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 일만 보아도 중동 축구는 한국축구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다시 월북 사건으로 돌아와 이 사건을 계기로 비록 사상불순자로 오해를 사기 는 했으나, 역설적으로 중동 축구가 북한 축구역사의 한 부분을 장식하게 된다. 39 회 최병섭 동문은 북한 청소년대표코치를, 39회 이범태 동문은 북한축구협회 심판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범태 동문의 동생인 44회 이범창 동문 역시 중동 축구 선수로

형제가 모두 중동 축구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중동 축구는 많은 역경을 이기고 팀을 재정비해 1946년 제1회 전국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서울시 기념대회 우승, 1947년 제2회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우승 이라는 성적을 올려 해방 후 새롭게 중동 축구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후 거침없는 연승 가도를 달린 중동 축구는 1948년 학도체육대회 서울예선 우승,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 등의 성적을 거두고 1949년에는 제1회 전국 학도 체육대회 우승과 함께 다시 한 번 전국축구선수권대회를 우승해 중동 축구의 놀라 운 실력을 입증했다.


그 당시 주축선수로는 42회 오완건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김명환전 모교 축구감독, 김 형배, 김돈해, 김포경, 강석영, 김석봉 동문 등이 있었고 또한 그해 1948년 런던올림 픽 국가대표선수로 38회 이시동 동문이 출전해 중동 축구를 세계로 알리는데 큰 몫 을 했다. 특히 오완건 동문은 27년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대한축구협회의 역 사이기도 하다. 또 김명환 동문은 10여 년간 무보수로 모교를 위해 축구부 감독을 하면서 많은 우수한 제자들을 배출시키고 모교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1975년과 1976년 전 고 교축구 대회를 석권하는 기록을 세웠고, 이후 국민대학교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면 서 국민대학교를 정상에 올리기도 했다.


1950년 보스톤마라톤 제패 기념 축구대회에서 경신을 2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 한 중동 축구는 같은 해 6월 20일 전국학도호국단대회가 6.25전쟁 발발로 중단된 이 후 전쟁 중에 펼쳐진 약간의 대회에 참가는 했으나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상처에 의해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6.25전쟁으로 인해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44회 신동호 동문은 당시 공격수로서 별명이 오토바이일 정도로 대표선수 이상의 기량이었으나 6.25전쟁 중 전투에서 전 사했다.


중동 축구는 6.25전쟁 중에 유니폼에 대한 일화가 있다. 원래 중동의 유니폼은 전통의 노란색으로 6.25전쟁 전부터 지금까지 착용하고 있으나, 6.25전쟁이 나자 노 란색 원단을 구하지 못해 흰색 상의와 청색 하의 유니폼을 착용한 적이 있었다. 타 학교 학생들은 중동의 노란색 유니폼만 보아도 존경의 대상이 될 만큼 노란색 유니

폼은 누구나 중동 축구임을 알 수 있을 만큼 유명했다.


중동 축구는 6.25전쟁 전에 이룩한 성적에 비해서는 약간의 침체기를 겪었다. 그러나 1954년 1월 한국 국가대표팀의 동남아 원정 당시 본교 48회 정형식, 이기주, 김영일 동문 등이 활약해 중동 축구의 위상은 계속 이어졌다. 걋?해 중동 축구는 그간의 부진을 극복하고 7월에 거행된 전국축구선수권대 회에서 영예의 우승을 차지했으며, 서울시선수권대회 준우승 등 다시 한 번 도약을 시작하며 빛나는 중동 축구인을 배출하기 시작한다.


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청룡기 전국 고교 선수권 대회에서 48회 이우현전 MBC 해설위원ㆍ전 국가대표, 장충준전 국회의원, 장대덕전 모교 축구OB 회장, 김상진ㆍ한영기ㆍ고 흥균ㆍ박귀상ㆍ엄경진ㆍ전용덕이상 전 국가대표, 이만우, 심재완 동문 등이 활약해 우 승을 차지했다.


48회 이우현 동문은 초대 서울 체육고등학교 축구부 코치와 MBC 해설위원 등 을 지내면서 많은 축구교재를 발간했다. 또한 서울 체고 출신으로 유명한 축구 해설 위원인 이용수, 신문선, 강신우 등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1955년을 거쳐 1956년에 이르러 중동 축구는 중동 축구 역사상 영원히 기록될 오관왕五冠王의 해를 맞는다. 당시 50회가 주축으로 활약한 중동 축구는 학도체육대 회 서울 예선에 첫 우승을 거둔 후 전국체전 축구 예선과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제 37회 전국체전, 전국고교축구대회 등 5개 대회를 모두 우승하는 전무후무한 성적을

올려 우리 나라 축구계를 경악케 하는 쾌거를 올렸다.


1956년에는 당시 주축선수로는 50회 이계근전 서울체고 감독, 김승환, 유현철한국 최초 독일 유소년축구 프로그램 도입ㆍ88올림픽 조직위원ㆍ현 효성그룹 고문, 최귀인전 모교 축구감 독), 유판순(전 모교축구감독ㆍ전 명지대 감독, 이동훈전 공군사관학교 감독, 이수덕, 최종국 등이 5관왕을 이룩한 자랑스러운 동문들이다.


50회 기수는 축구도 잘했지만 명물도 많았다. 특히 우리 중동 축구의 명물 50회 유판순본명 유종원 동문의 일화가 유명하다. 대표선수시절 일본과의 시합 중 벤치에 있었던 유판순은 우리 나라가 일본 대표팀에 뒤지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해 본인 스 스로 감독의 허락도 안 받고 교체멤버로 출전해 승리를 이끌었다고 한다. 명지대학 교 감독 시절에는 관중들이 시합보다도 감독의 욕하는 모습을 더 재미있게 본 시절 도 있었다. 50회 유현철 동문은 한전 축구단 감독으로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특히 모교 후배들을 한전 축구부로 영입해서 대표선수로 키웠는데 74회 김용세전 월드컵대표가 대표적이다.


50회 장충준은 축구선수로는 흔치 않게 민주당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50회 최 종국 동문은 당시 중동 축구의 센터포워드로 전국 고교랭킹 1위였으나 아쉽게도 주 먹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주먹이었다. 졸업 당시 영등포 삼일당의 벽돌 기습으로 큰 사고를 당하기도 한 그는 이후 명동의 신상사와 지금까지 한국 주먹계의 큰형님으

로 불려지고 있다.


1957년에도 역시 중동 축구는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우승, 전국체전 서울예선 준우승, 서울시 4대 고교 축구대회 우승 등의 성적을 올려 그 해 열린 말레이시아 라 만 수상컵 쟁탈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를 대비해 결성한 첫 한국 청소년대표팀에 차 경복전전 성남 일화프로축구감독, 강창선, 이낙원, 박경구 등 중동 선수가 7명이나 선발 되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난날의 영광을 뒤로 하고 중동 축구는 이후 10년 가까이 침 체기를 갖게 된다.


1968년에 중동 축구는 서서히 재기에 성공해 그 해 거의 10년 만에 종합선수권 을 차지했다. 그 당시의 멤버를 보면 61회 나성수, 62회 원홍재, 조한흥이상 전 청소년 대표, 63회 고재욱전 모교감독ㆍ전 국가대표 현 관동대학교 축구감독, 64회 황재만전 국가대표 등 을 비롯해 서대기, 김상희전 청소년대표 오우석, 김종철현 모교 체육교사, 65회 한병호ㆍ 박용덕ㆍ박동식이상 전 청소년대표, 66회 이종설전 청소년대표, 67회 장기문전 국가대표 동 문 등이 활약했다.


이 진용은 다음 해까지 계속 이어져 1969년 제18회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에 서 종합 전적 6승으로 전국의 강호 16팀을 물리치고 당당히 우승의 영광을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해 한ㆍ일 교환경기의 대표권을 얻은 중동 축구는 일본 아끼 다상고 대표팀을 11대0으로 대파하는 등 화려한 전적을 남겼다. 당시 60~70년대 중동축구를 빛낸 동문들은 53회 전상준전 청소년대표, 황정일20년 간 중동중고등학교 축구부감독, 54회 김상구전 국가대표, 오근영전 대전상고 감독, 심근택전 모교 감독, 55회 홍인웅전 국가대표, 안원남전 국가대표, 주민환전 국가대표, 56회 김호엽전 국가대 표, 임충웅전 청소년대표, 서재학전 청소년대표, 57회 조명철현 OB축구회 회장, 이 관전 청소년 대표, 이충남전 청소년대표, 58회 조중연전 청소년대표ㆍ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59회 김원태전 청소년대표, 송영준전 청소년대표 등이 있다.


53회 황정일 동문은 20여 년간 중동중학교 감독을 하면서 많은 제자를 배출했 고 특히 이번 100년사에 많은 정보와 자료를 제공했다.


58회 조중연 동문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지난 2002년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주역 중에 주역으로 모교 축구감독 과 현대 프로축구단 감독 도 역임한 자랑스러운 동문이다.


54회 오근영 동문은 대전상고 축구부 감독을 하면서 한국축구계의 유명한 골잡

이 이태호 선수를 배출했다.


63회 고재욱 동문은 대표선수 시절 한전과의 경기 중 무릎 부상으로 화려한 대 표선수를 마감하고 영남상고 축구부 감독에 부임한 다음 모교 축구 감독으로 부임 해 다음해 전국고교축구대회 4개중 3번을 결승에 올려놓았다. 또한 고재욱 동문은 한국 축구계에 특별한 스타급 선수를 배출시키는데 75회 조민국전 월드컵대표ㆍ현 고려대학교 감독과 비운의 스타 76회 김종부전 월드컵대표ㆍ현 모교 축구감독 동문을 배출했으며, 이후 럭키금성 프로축구단 코치와 감독을 역임하며 팀 을 슈퍼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1991년과 1995년에는 한국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활약하다 현재는 관동대학교 감독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64회 황재만 동문은 아시아 최고의 수비수로 10여 년간 한국 대표팀 부동의 수 비수로 롱킥 과 롱드로잉, 거친 태클로 유명했다. 이후 할레루야 축구단 선수 및 코 치 , 감독을 지내며 프로축구 원년 우승의 영광도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 원인모를 병으로 투병중인 황재만 동문은 굴하지 않는 사자정신으로 현재 한국 장애인럭비협 회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67회 장기문 동문은 별명이 검은 장갑으로 그 이름만 들어도 상대 팀 선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아마도 중동의 정신인 사자정신이 있었기 때문인 것 으로 생각된다. 1970년대 들어 다시 한 번 중동 축구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1974년에 들어 전통

의 저력을 과시하던 중동 축구는 다시 한 번 전국의 모든 패권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중동 축구는 그해 춘계연맹전, 건대총장배 대회, 대통령금배, 추계연맹전, 경부 고교 축구대회 등에서 모두 우승하는 쾌거를 올려 중동 축구의 역사를 잇는 성적을 올린다. 이 같은 중동 축구의 빛나는 성적을 이룬 원동력은 무엇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오직 모교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운동장을 누비던 선수들과 지도자의 힘이 크다. 1970년대 중동 축구부가 사용했던 운동장은 운동장 상태 와 시설이 매우 열악해 일명‘미아리 운동장’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였고, 작은 동산을 없애고 선수들이 직접 운동장을 만들었으나 운동장이 고르지 못해 매일 선수들이 돌을 주워 나르면서 축구연습을 했다. 이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고생하는 축구부 선수들을 위해 돈을 모아 돼지를 기르기 시작었다. 매일 저녁 미아리 일 대 식당에서 돼지 밥을 구해 양육을 하던 어느 날 그 유명한 유판순 동문이 모든 돼지를 선수들의 체력 보강을 위해 잡았 다고 한다.


이처럼 축구 연습만 해도 모자랄 선수들이 운동장을 고르고 돼지를 키우는 등 참으로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적을 올리고 수많은 국가대표선수들이 배 출했던 것은 중동인의 정신, 바로 사자정신을 나타내 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또한 1975년 제68회 대통령배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부산상고와 연 장전 끝에 승부차기에서 승리했다. 우승의 기쁨으로 재학생과 응원했던 전 동문이 당시 동대문운동장에서 종로 모교까지 거리행진을 해 학교에 도착하니 자정에 가까 운 시간으로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어 전교생이 학교에서 잠을 자고 그 다음 날 수 업에 임했다는 일화도 있다.


80년대 이후의 중동 축구


이후 특출한 성적으로 국내 무대는 물론 해외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은 중동 축구는 1980년 일본 구마모토熊本에서 열린 한ㆍ일 고교교환 경기에 출전해 3전 전승을 기 록했고, 그 해 서울특별시 고교축구대회에서 우승해 일본 도쿄東京에서 개최된 한ㆍ 일 수도권 교환경기대회에 일본팀과 대전해 3전 3승을 기록했다. 당시 맹활약한 선수로는 68회 고청범, 이기석 이성용이상 전 청소년대표, 69회 이남 수, 최재필, 김재원이상 전 청소년대표, 70회 김성호전 청소년대표, 71회 유재영, 임지우, 김원근이상 전 청소년대표, 72회 김용세전 월드컵대표, 74회 김광용현 모교 축구부 부장, 75회 조민국전 월드컵대표ㆍ현 고려대 감독, 변종국독일 유학청소년대표ㆍ현 아약스코리아 유소년축구단 단장, 차상광전 국가대표ㆍ성남 일화 코치, 76회 김종부전 월드컵대표ㆍ현 모교 감독, 77회 김남 호, 박동규이상 전 청소년 대표, 78회 차상해전 국가대표, 손태호현 모교 코치, 79회 허기태, 서효원이상 전 국가대표, 김두선전 모교 코치, 김청훈현 청소년대표 코치, 80회 이승욱현 중 동중학교 감독, 81회 이병성전 청소년, 82회 송 훈전 청소년 대표, 김용범전 국가대표, 85회 김상훈, 박충균이상 전 국가대표, 서동훈, 박정민전 남북 단일팀 대표 94회 이호전 월드컵대표 등이 있다.


1984년에는 전국 중ㆍ고 축구대회에서 우승해 인도에서 열린 아시아 학생축구

선수권 대회의 한국 대표로 출전해 활약했다. 이에 앞서 1983년 멕시코에서 열린 20세 이하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우리 대 표팀은 전 세계의 축구 강국들을 물리치고 사상 처음으로 4위를 차지해 한국 축구 의 놀라운 힘을 세계에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 당시 76회 김종부 동문은 공격수로 맹 활약해 세계 축구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한국 축구는 1954년 스위스월드컵 이래 32년만인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 출전 하며 이후 2006년 독일 월드컵까지 6회 연속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함으로써 통산 7회 로 아시아 최다 월드컵 본선 진출국이 됨은 물론, 세계 수준에 근접한 한국 축구 의 우수성을 지구촌의 모든 축구팬에게 과시했다. 당시 멕시코월드컵에서는 72회 김용세, 75회 조민국, 76회 김종부 동문이 대표 선수로 발탁돼 우수한 기량을 선보이며 중동 축구를 빛냈다. 또한 1998년 프랑스월 드컵에서는 76회 정성진 동문이 국가대표 골키퍼 코치로 참가했고, 2006년 독일월 드컵에서는 94회 이 호 동문이 좋은 경기를 펼쳐 중동 축구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 렸다.


영원히 이어 나갈 중동 축구의 영광 나라의 운명이 외세에 좌지우지되던 1900년대 초 탄생한 중동학교가 민족 교육의 요람으로 숭고한 의무를 지켜 온지 올해로 100년이 됐다. 이와 함께 중동인들도 축 구라는 매개체로 동문 간 뜨거운 애교심과 협동심을 통해 한국 축구계는 물론 국가 의 발전에도 매우 중요한 역사를 창조해 냈다. 우리 중동 축구 역사를 돌아볼 때 수많은 난관과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 중동인의 뜨거운 축구 사랑과 선수들이 보여준 불굴의 투지, 사자정신, 세계를 향한 끊임없는 도전정신이야말로 중동 축구의 빛나는 역사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우리 중동 축구도 새롭게 시작한 21세기에 발맞춰 100년을 넘어 1천년 미래로 나가는 큰 발자국을 이미 내디뎠다. 새로운 환경에 발맞춘 지도자들의 노력과 선수 들의 땀, 수천수만 동문들의 모교 사랑, 불굴의 사자정신 등이 중동 축구의 미래를 밝혀 수천 년 후까지 중동 축구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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