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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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참단(兵站團)은 과거 육군에서 병참 물자 수급 따위의 업무를 맡아보던 부대이며 육군병참단이라고도 불리웠다. 한국전쟁때 창단된 병참단 축구단은 이후 다른 육군 축구팀이 해체되는 와중에도 살아남아 육군 유일의 축구단이 되었다. 병참단 축구단은 육군 축구단, 육군 원호단, 충의부대, 웅비부대 등의 이름을 거쳐 3군 체육단의 통합으로 탄생한 상무 축구단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병참단

병참단은 군에서 급식, 물자, 유류 등의 수급을 맡던 부대를 칭하는 말로 한국군에서는 현재 병참단이라는 명칭은 사용되지 않고 있다. 병참단과 관련된 병참병과는 1948년 제1병참대대가 창설되고 그해 말 병참병과가 제정된 것이 시초이다. 병참사령부, 병참기지사령부, 병참참모부, 군수사병참참모부 등 여러 이름으로 변경되었으며, 병참, 보급, 유류 등의 이름을 가진 여러 부대가 병참관련 병과이다. 육본 병참감실의 해체이후 현재 육군 병참병과의 장은 병참교육단장이다.


병참단 축구단

파일:병참단 축구단.jpg
병참단 축구단 일동 기념촬영

병참단 축구단은 한국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3월 부산에서 병참감 김일기 장군에 의해 전원 장교로 이루어진 육군 보병학교 장교 축구단을 창설된 것이 그 시초이다. 그 이듬해 보병학교가 광주로 이전하면서 병참감실에서 관리운영하게 되고 육군 병참팀으로 출전하게 된다. 당시 금성방직에 근무하던 김용식[1]감독의 지도를 받기 위해 안양에서 훈련하며 많은 성과가 있었다. 1965년 특무대헌병감 축구팀이 예산부족 등의 이유로 해체하여 공병단을 중심으로 육군단일팀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고 이를 병참단이 흡수, 1969년부터 병참단에서 관리하면서 육군의 유일한 대표팀이 되었다.[2] 이후 충의, 웅비 등으로 이름을 바뀌면서 유지되다가 1983년 해룡, 성무와 통합되어 상무가 되었다.

병참단의 연고지는 현재 정확히 알 수 없으나 62년에는 전국체전 예선 겸 서울시체육대회 축구종목에 출전했다. 또 70년 전국체전에는 부산을 대표해 출전하기도 했다.[3]


성적


유명 선수

강찬우, 이규남, 유광준


같이 보기


참고

  1. 당시 김용식은 국가대표 코치 및 감독직에 있었으나 당시의 국가대표 감독직은 임시직에 불과해서 필요시에만 차출되는 상태라 생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자리였다. 그래서 당시 금성재벌(쌍용그룹)의 김성곤씨의 도움으로 금성방직에서 감사직을 맡고 있었다. 비슷한 예로 마라톤 손기정 선수도 조선방직에서 상무직을 맡고 있었다. 김용식 선생의 영향으로 이후 60년대에 금성방직 축구단이 창단되기도 했다.
  2. 1969년 전국축구 선수권대회에서 육군팀이 우승하였을 때 1958년에 이어 11년만의 우승이라고 칭했으니 육군팀이 병참단의 역사를 계승했다는 증명.
  3. 62년 전국체전에서 공병단이 경남대표로 출전한 것 외에는 특무대, 헌병감실, 병참단 모두 서울시 예선에 참가했다. 사실 군팀이 아니더라도 대구경북의 제일모직외에는 지방에는 축구팀이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실업축구팀이 서울에만 있던 상황이라 부산대표로 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구대표로 고양 국민은행이 출전하는 웃기는 현실은 비단 현재의 문제는 아니었던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