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성축구단 (조선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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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성축구단(全京城蹴球團)일제강점기 조선국가대표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출전을 위한 선발전에 참가하기 위해 조선축구협회가 구성한 조선축구협회대표팀 또는 조선대표축구팀으로 한국 축구 최초로 협회가 구성한 국가대표팀이라 할 수 있다.


역사[편집]

전경성축구단의 출범[편집]

조선축구협회가 발족한 후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가 치러지고 있었던 1935년, 당시 일본축구협회는 다가오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할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선발을 위해 제15회 일본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고 일본 축협 측은 조선에서도 축구선수권 참가팀을 구성하라는 통지를 하였던 바 있다. 이에 조선축구협회는 조선축구대표 선발전을 실시하여 경성축구단을 중심으로 선수단을 구성한 바 이것이, '전경성축구단' (또는 '조선축구협회대표팀)의 출범이었으며 오늘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신이자 한국 축구 최초의 축구협회가 구성한 국가대표라 할 수 있다.

이 때 조선축구협회는 경성축구단을 중심으로 보성전문, 연희전문, 평양 축구단에서 픽업한 1차 대표팀을 꾸리고 명단을 통보하였으나, 일본축구협회측에서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 우승팀인 경성축구단을 대표로 선발전에 내보내라고 지시하여 재차 2차 대표팀을 꾸리고 최종 명단을 통보하였다.[1]


전경성축구단의 2차 출전[편집]

구성[편집]

1935년 5월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참가팀[편집]

1차 명단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스탭진
감독 이인규정문기 조선축구협회 작고
매니저 권희창
연습감독[2] 김화집
선수단
GK 이혜봉 경성축구단 작고
FB 박규정 보성전문
정용수 연희전문
이봉호
HB 김병희 보성전문
이유형 연희전문
강기순 평양축구단
박형렬
박인식
FW[3] 최성손 경성축구단
채금석
고홍관
김용식 보성전문
배종호
박효제
이정현 평양축구단
박의현
김영근
김성간
이정식
이치순
김경한 연희전문
최종 명단[4]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스탭진
조선축구협회 대표 이인규권희창 조선축구협회 작고
경성축구단 대표 배석환
감독 현정주
매니저 이영선
선수단
GK 이혜봉 경성축구단 작고
FB 박규정 보성전문
정용수 연희전문
이봉호
HB 김병희 보성전문
이유형 연희전문
강기순 평양축구단
박형렬
FW 최성손 경성축구단
이영민
김용식 보성전문
배종호
박효제
이정현 평양축구단
박의현
김영근
김경한 연희전문
후보
김성간, 이치순, 이정식, 채금석, 고홍관


1935년 10월 명치신궁경기대회 참가팀[편집]

최종 명단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스탭진
감독 조선축구협회 작고
매니저
선수단
GK 이혜봉 경성축구단 작고
FB 박규정 보성전문
정용수 연희전문
박형렬 숭실전문
HB 김용식 보성전문
윤창선 숭실전문
강기순 평양축구단
박인식
이유형 연희전문
FW 최성손 경성축구단
이영민
배종호 보성전문
이정현 평양축구단
이치순
박제환
김영근 숭실전문
김성간 연희전문


결과[편집]

1935년 5월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편집]

본선 참가를 위해 일본에 입성한 전경성축구단은, 본선 4강에서 나고야상대(名古屋高商)를 6:0, 결승전에서 도쿄문리대(東京文理大学)를 6:1[5]로 박살내며 35년 대회를 우승으로 장식하며 금의환향하게 된다. 당시 결승전에 출전한 전경성축구단 멤버는 다음과 같다.[6]


포지션 이름
GK 이혜봉
FB 박규정 (RFB) / 정용수 (LFB)
HB 이유형 (RHB) / 김용식 (CHB) / 김병희 (LHB)
WF 박효제 (RWF) / 강기순 (LWF)
IF 김경한 (LIF) / 배종호 (RIF)
CF 김성간


1935년 10~11월 명치신궁경기대회[편집]

파일:1935명치신궁.jpg
명치신궁경기대회 우승 후 기념 촬영한 조선대표팀

전경성축구단은, 1차전에서 중국 선발[7]을 6:2로 누른 뒤 2차전에서 북해도 하코다테 팀과 일전을 치렀다.[8] 1차전과 달리 2차전은 상당히 고전하였는데, 당시 0:1 리드를 내준 뒤 전경성 선수들이 지나치게 서두르는 플레이를 보였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는 후반전에도 이어졌는데, 설상가상이라고 상대팀에 PK 까지 내주는 실수를 저지른다. 다들 '이제 졌구나' 하고 낙담하려던 찰나, 하코다테 선수가 PK를 실축[9] 하며 분위기가 역전되었고 결국 김영근, 김성간 선수의 연속골로 2차전마저 승리로 장식한다. 이후 완전히 몸이 풀린 전경성축구단은 준결승전에서 일본 간사이대학(関西大学)를 6:0, 결승전에서 일본 게이오대학(慶應義塾大学)을 2:0으로 연파하며 전일본선수권에 이어 2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1. 올림픽제패목표로 경축28일동경에 -1935-05-25,동아일보-
  2. 실질적으로 축구 팀을 지도하고 전술을 짜는 역할을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3. 인너, 윙어 포지션 선수들도 모두 포워드 포지션에 분류하였다.
  4. 1차 명단하고 비교해보면 평양 축구단의 박인식을 빼고 경성 축구단의 주장 이영민이 들어간 것을 제외하면 1차 명단하고 크게 달라진게 없다.
  5. 특히 이 경기에서 김성간 선수는 해트트릭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6. 출처 : 大島裕史 『日韓キックオフ伝説 ワールドカップ共催への長き道のり』(文庫版) 集英社、2002年、67頁
  7. 臥虎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 일제 통치하에 놓여있던 타이완에서 파견된 축구 선발팀이 아닐까 싶다.
  8. 월간축구 1971년 9월호, 이유형 씨와의 인터뷰에서는 하코다테와의 경기가 전일본축구선수권 1차전인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아마도 기억에 혼선이 있으셨던듯. 반면 월간축구 1973년 4월호에 실린 김성간 씨의 인터뷰에는 하코다테와의 경기가 명치신궁대회 2차전이었던 점과 스코어까지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또한 김씨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경기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당시 일본육사 조선인 생도였던 채병덕, 이종찬, 이용문 등이 응원을 왔었다고 한다.
  9. 하코다테 선수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볼을 찬게 아니라 땅을 긁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힘이 안실린 볼은 데굴데굴 굴러가 골키퍼 품에 안겼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