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록

파일:류영록과 김성수.jpg
2004년 GK 클리닉을 지도하던 류영록
좌측이 류영록, 우측은 김성수.

류영록(1969년 9월 4일~)는 대한민국 출신의 축구선수이자 축구인으로 1992년부터 1995년까지 K리그에서 활동한 골키퍼 출신 GK 코치이다.

본래 2007년 8월 이전까지 성명은 유영록이었으나, 2007년 8월 호적에 성을 등기할 때 두음법칙에 따라 유,나,이로 성을 등기하도록 했던 예규를 수정하여 류, 라, 리 성표기가 가능해짐에 따라 류영록으로 성명이 변경되었다.



프로필편집

  • 이름 : 류영록
  • 출생일 : 1969년 9월 4일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 K리그 기록
소속팀 연도 출장 교체 실점 도움 경고 퇴장
포항제철 아톰즈 1992 1 0 4 0 0 0
대우 로얄즈 1993 1 0 2 0 0 0
대우 로얄즈 1994 9 1 12 0 1 0
부산 대우 로얄즈 1995 0 - - - - -
통산(K리그) - 11 18 0 0 1 0
K리그 통산기록은 리그컵기록 포함. 2010년 6월 30일 기준.
연맹 공식 DB

지도자 프로필편집

연도 소속팀 직책
2002 ~ 2004 용인시축구센터 코치
2005 ~ 2006 건국대학교 축구부 GK 코치
2007 ~ 2008 대한축구협회 유소년 육성 프로그램
2009 대한민국 U-17 축구대표팀
2010 대한축구협회 14세 이하 유소년 대표 상비군
2011 대한민국 U-17 축구대표팀
2011 ~ 2013 대한민국 U-20 여자 축구 국가대표


유소년 생활편집

건국대 재학 시절, 대학권 최고의 GK로 김봉수 선수와 1,2위를 다투었던 선수이다.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팀의 1선발이었던 김봉수 골키퍼가 허리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일시 제외됨에 따라, 1992년 3월 19일 對 미국 축구대표팀과의 평가전에 선발 출장하였으나 볼처리 미숙과 집중력 부족으로 순식간에 3실점해 신범철 선수와 교체되었다. 신선수는 남은 경기 시간동안 무실점으로 잘 막았고, 이 평가전을 계기로 류영록 선수는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팀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프로 생활편집

1992년 드래프트에서 3순위 지명으로 포항제철 아톰즈에 입단하였으나, 데뷔전에서 4실점을 하는 최악의 활약으로 입지를 잃었다. 이듬해인 1993년 완산 푸마가 창단됨에 따라, 포철측은 완산이 1993년 드래프트장에서 지명할 것으로 확실시되는 황선홍을 포항 제철로 데려오기위해 완산측에 1:4 트레이드를 제의했고, 포철이 제시한 4명 중에 류영록 선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완산 푸마가 이를 승낙함에 따라 류영록 선수는 완산 푸마의 창단 멤버로 입단하게된다. (자세한 것은 1993년 드래프트 참조)



그러나, 완산 푸마는 93시즌을 참가하지 못한채 경영위기에 봉착했고 이에 완산 소속 선수 중 실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었던 선수들은 다른 팀을 찾아 떠나감에 따라 완산 푸마는 와해될 지경에 이르렀다. 포철 측은, 1:5 트레이드 당시 완산에 넘겼던 5명의 선수 중 김기남, 공문배 선수는 곧바로 재영입하였으나 이기근, 류영록의 재영입은 연봉 마찰과 포철측의 적극적인 협상 의지 부족으로 결렬되었다. 결국 이기근, 류영록은 대우 로얄즈의 적극적인 구애에 따라 대우에 입단하게 된다.[1] 대우측은 류영록 선수를 김풍주의 차세대 후계자로 키울 요량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대학 시절부터 대표팀 라이벌이었던 신범철 선수에게 또다시 주전경쟁에서 밀리며 95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정리하였다.


지도자 생활편집

선수 생활을 정리 후, GK 코치 교육과정을 이수한 류영록 코치는 용인 FC코치 , 건국대학교 GK코치 등으로 부임해 대학권 GK 코치로 명성을 떨쳤다. 이후 대한축구협회가 주관하는 유소년 GK 클리닉과 유소년 육성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류영록 코치는 2009년 AFC U-16 챔피언십 GK 코치로 발탁되어 활약하였다. 2010년 현재는 14세 이하 유소년 상비군 훈련 전담 코치를 맡고 있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에피소드편집

경력편집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참고편집

  1. 다만, 이흥실 선수는 원래 91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려다 완산 푸마의 권유로 플레잉코치로 선수생활을 연장하려했던 것이기 때문에 완산 푸마 사태가 파국을 맞이하자 미련없이 선수생활을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