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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벌이 된 계기 ==
수원은 창단당시에는 [[울산 현대]]와 앙숙관계와 있었다. 수원이 창단할 당시 재계 라이벌이었던 울산은 수원을 가만히 프로축구에 입성하게 놔두지 않았고, 이는 1996년 챔피언 결정전의 대난투로까지 이어지며 이어졌다. 하지만, 1999년 이를 뛰어넘은 희대의 라이벌이 성사되었다. 바로 안양 LG였다. 창단당시에는 안양과 수원은 재계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안양의 성적이 워낙 좋지 않았기 때문에 수원의 승승장구를 부럽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는 1998년까지 이어지게 되었는데, 1999년 드디어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조광래]] 수원 수석코치가 [[김호]] 감독과의 불화로 팀을 떠나며 안양 LG의 감독으로 부임한 것. 조광래는 안양축구의 부흥을 위해 '''수원은 꼭 안양이 이긴다'''라는 말을 하며 수원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는 수원팬들에게 분노의 불을 당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수원은 안양으로 떠난 조광래 감독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되는데, 바로 '''서정원 사건'''이다. 1991년 [[LG 치타스]]에 입단하며 선수생활을 시작한 서정원은 1998년 프랑스 리그앙의 스트라스부르그로 이적하면서, '''K리그로 돌아오게 된다면 안양으로 돌아오겠다.'''라는 말을 하며 프랑스로 날아갔다. 하지만, 서정원은 '98-'99시즌 주전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지자 국내 복귀를 모색했고, 수원은 서정원에게 당시로서는 최고액인 이적료 50만달러(한화 약 6억원), 연봉 2억원에 수원과 입단계약을 체결하였다. 완벽하게 안양을 배신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날 김포공항에서 서정원은 당당히 수원의 유니폼을 입었고, 이를 본 안양팬들은 분노를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999년 슈퍼컵에서 안양은 서정원의 유니폼을 불태우며 분노했고, 서정원은 이에 보란듯이 안양의 수비진을 휘저으며 수원의 5:1 대승을 이끌었다. 이를 기점으로 두 팀의 라이벌 의식은 심화되었고 2003년 전0년도 안양 소속이었던 [[뚜따]]의 이적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는 안양이 없어지기 전인 2003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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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은 창단당시에는 [[울산 현대]]와 앙숙관계와 있었다. 수원이 창단할 당시 재계 라이벌이었던 울산은 수원을 가만히 프로축구에 입성하게 놔두지 않았고, 이는 1996년 챔피언 결정전의 대난투로까지 이어지며 이어졌다. 하지만, 1999년 이를 뛰어넘은 희대의 라이벌이 성사되었다. 바로 안양 LG였다. 창단당시에는 안양과 수원은 재계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안양의 성적이 워낙 좋지 않았기 때문에 수원의 승승장구를 부럽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는 1998년까지 이어지게 되었는데, 1999년 드디어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조광래]] 수원 수석코치가 [[김호]] 감독과의 불화로 팀을 떠나며 안양 LG의 감독으로 부임한 것. 조광래는 안양축구의 부흥을 위해 '''수원은 꼭 안양이 이긴다'''라는 말을 하며 수원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는 수원팬들에게 분노의 불을 당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수원은 안양으로 떠난 조광래 감독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되는데, 바로 '''서정원 사건'''이다. 1991년 [[LG 치타스]]에 입단하며 선수생활을 시작한 서정원은 1998년 프랑스 리그앙의 스트라스부르그로 이적하면서, '''K리그로 돌아오게 된다면 안양으로 돌아오겠다.'''라는 말을 하며 프랑스로 날아갔다. 하지만, 서정원은 '98-'99시즌 주전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지자 국내 복귀를 모색했고, 수원은 서정원에게 당시로서는 최고액인 이적료 50만달러(한화 약 6억원), 연봉 2억원에 수원과 입단계약을 체결하였다. 완벽하게 안양을 배신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날 김포공항에서 서정원은 당당히 수원의 유니폼을 입었고, 이를 본 안양팬들은 분노를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999년 슈퍼컵에서 안양은 서정원의 유니폼을 불태우며 분노했고, 서정원은 이에 보란듯이 안양의 수비진을 휘저으며 수원의 5:1 대승을 이끌었다. 이를 기점으로 두 팀의 라이벌 의식은 심화되었고 2003년 전0년도 안양 소속이었던 [[뚜따]]의 이적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는 안양이 없어지기 전인 2003년 말까지 계속되었지만, 2004년 LG가 서울로 옮기면서 지지대 더비는 종식되었다.
  
 
== 지지대 더비 명승부 열전 ==  
 
== 지지대 더비 명승부 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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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03년 10월 8일 (수원 2-1 안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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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02년 8월 18일 (안양 2-1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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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패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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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15일 (화) 12:10 판

지지대 더비란, 수원 삼성 블루윙즈안양 LG 치타스라이벌 경기를 가리키는 말로 수원과 안양 사이에 위치하며 양 지역을 1번국도를 통해 오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지대(遲遲臺) 고개에서 유래되었다. 2003년까지 K리그에 존재했던 라이벌 경기로써, 이제는 안양이 사라지면서 추억 속에만 남아있는 라이벌전이다.


라이벌이 된 계기

수원은 창단당시에는 울산 현대와 앙숙관계와 있었다. 수원이 창단할 당시 재계 라이벌이었던 울산은 수원을 가만히 프로축구에 입성하게 놔두지 않았고, 이는 1996년 챔피언 결정전의 대난투로까지 이어지며 이어졌다. 하지만, 1999년 이를 뛰어넘은 희대의 라이벌이 성사되었다. 바로 안양 LG였다. 창단당시에는 안양과 수원은 재계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안양의 성적이 워낙 좋지 않았기 때문에 수원의 승승장구를 부럽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는 1998년까지 이어지게 되었는데, 1999년 드디어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조광래 수원 수석코치가 김호 감독과의 불화로 팀을 떠나며 안양 LG의 감독으로 부임한 것. 조광래는 안양축구의 부흥을 위해 수원은 꼭 안양이 이긴다라는 말을 하며 수원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는 수원팬들에게 분노의 불을 당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수원은 안양으로 떠난 조광래 감독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되는데, 바로 서정원 사건이다. 1991년 LG 치타스에 입단하며 선수생활을 시작한 서정원은 1998년 프랑스 리그앙의 스트라스부르그로 이적하면서, K리그로 돌아오게 된다면 안양으로 돌아오겠다.라는 말을 하며 프랑스로 날아갔다. 하지만, 서정원은 '98-'99시즌 주전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지자 국내 복귀를 모색했고, 수원은 서정원에게 당시로서는 최고액인 이적료 50만달러(한화 약 6억원), 연봉 2억원에 수원과 입단계약을 체결하였다. 완벽하게 안양을 배신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날 김포공항에서 서정원은 당당히 수원의 유니폼을 입었고, 이를 본 안양팬들은 분노를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999년 슈퍼컵에서 안양은 서정원의 유니폼을 불태우며 분노했고, 서정원은 이에 보란듯이 안양의 수비진을 휘저으며 수원의 5:1 대승을 이끌었다. 이를 기점으로 두 팀의 라이벌 의식은 심화되었고 2003년 전0년도 안양 소속이었던 뚜따의 이적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는 안양이 없어지기 전인 2003년 말까지 계속되었지만, 2004년 LG가 서울로 옮기면서 지지대 더비는 종식되었다.

지지대 더비 명승부 열전

1. 2003년 5월 18일 (수원 3-1 안양)

2. 2003년 10월 8일 (수원 2-1 안양)

3. 2000년 5월 21일 (안양 2-1 수원)

4. 2003년 9월 14일 (수원 2-0 안양)

5. 2002년 8월 18일 (안양 2-1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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