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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모직 ==
 
== 제일모직 ==
'''제일모직'''은 1954년 이병철에 의해 창립된 이래 계속 [[삼성그룹]]의 주력회사로 자리잡아 오고 있다. 처음에는 모직사업으로 시작하였으나, 합섬 등 직물 전반으로 확장하였으며, 직물사업을 기반으로 1970년대 패션 사업 진출, 1980년대 후반 화학 사업 진출, 2000년대에는 전자소재 산업으로 진출하여 2010년대에는 모직이라는 화사명에 어울리지 않게 직물, 패션사업부분은 30%에 불과하며, 2013년 삼성그룹 후계구도와 관련하여 패션사업부분을 에버랜드로 이관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제 모직이라는 이름을 떼어내야 할 듯. 대구 칠성동<ref>현재에도 제일모직 공장터는 남아 있는데 대구 오페라하우스 및 [[홈플러스]] 1호점인 대구 칠성점을 포함한 부지가 모두 제일모직 대구공장터였다. 칠성동과 침산동 일대 10만제곱미터 규모. 제일모직이나 삼성입장에서는 그 금싸라기 자리에 아파트를 짖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으나 대구 지역 여론(대구가 삼성을 키워줬는데 삼성 상용차 이후로 대구에 삼성관련 기업이 하나도 없고 지역에 무심하다)으로 인해 여론을 살피며 간(대구 오페라 하우스 건립 기부 등)만 보고 있다. 사실 상업시설 개발안이 십수년간 있었으나 대구의 경기문제 등 복합적인 문제가 있다.</ref>에 첫공장인 대구공장을 건립하였고 이 곳을 기반으로 일모축구단이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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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모직'''은 1954년 이병철에 의해 창립된 이래 계속 [[삼성그룹]]의 주력회사로 자리잡아 오고 있다. 처음에는 모직사업으로 시작하였으나, 합섬 등 직물 전반으로 확장하였으며, 직물사업을 기반으로 1970년대 패션 사업 진출, 1980년대 후반 화학 사업 진출, 2000년대에는 전자소재 산업으로 진출하여 2012년말 기준으로 모직이라는 회사명에 어울리지 않게 직물, 패션사업부분은 30%에 불과하며, 2013년 삼성그룹 후계구도와 관련하여 패션사업부분을 에버랜드로 양도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제 모직이라는 이름을 떼어내야 할 듯. 대구 칠성동<ref>현재에도 제일모직 공장터는 남아 있는데 대구 오페라하우스 및 [[홈플러스]] 1호점인 대구 칠성점을 포함한 부지가 모두 제일모직 대구공장터였다. 칠성동과 침산동 일대 10만제곱미터 규모. 제일모직이나 삼성입장에서는 그 금싸라기 자리에 아파트를 짖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으나 대구 지역 여론(대구가 삼성을 키워줬는데 삼성 상용차 이후로 대구에 삼성관련 기업이 하나도 없고 지역에 무심하다)으로 인해 여론을 살피며 간(대구 오페라 하우스 건립 기부 등)만 보고 있다. 사실 상업시설 개발안이 십수년간 있었으나 대구의 경기문제 등 복합적인 문제가 있다.</ref>에 첫공장인 대구공장을 건립하였고 이 곳을 기반으로 일모축구단이 활동하였다.   
  
 
===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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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제일모직주식회사로 상호 변경, 안양공장 준공(의류패션).
 
* 1976년 제일모직주식회사로 상호 변경, 안양공장 준공(의류패션).
 
* 1978년 구미공장 준공
 
* 1978년 구미공장 준공
* 1989년 영문상호 CHEIL INDUSTRIES INC.로 변경, 여천공장 준공(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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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영문상호 Cheil Wool Textile에서 CHEIL INDUSTRIES INC.로 변경, 여천공장 준공(화학)
 
* 1996년 대구공장, 구미공장과 통합 및 이전
 
* 1996년 대구공장, 구미공장과 통합 및 이전
 
* 1999년 삼성물산 의류부분인 에스에스패션(갤럭시, [[라피도]] 등) 흡수 통합
 
* 1999년 삼성물산 의류부분인 에스에스패션(갤럭시, [[라피도]] 등) 흡수 통합
 
* 2000년 화학 분야로 증권거래소 업종 등록 변경, 칠성동2가 옛 대구공장 부지에 대구오페라하우스 기공
 
* 2000년 화학 분야로 증권거래소 업종 등록 변경, 칠성동2가 옛 대구공장 부지에 대구오페라하우스 기공
 
* 2003년 8월 7일 대구오페라하우스 완공, 기증
 
* 2003년 8월 7일 대구오페라하우스 완공, 기증
* 2013년 9월 23일 제일모직 의류패션사업 부분 에버랜드로 이관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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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9월 23일 제일모직 의류패션사업 부분 1조 500억에 에버랜드로 양도 발표<ref>[http://media.daum.net/economic/others/newsview?newsid=20130923100413772 제일모직, 패션사업 에버랜드에 넘겨..소재사업 주력] -[[연합뉴스]], 2013년 9월 23일- </ref>
  
 
=== 사업 분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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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모직 축구단 ==
 
== 제일모직 축구단 ==
 
[[파일:대구_시민운동장.jpg|썸네일|380픽셀|1970년대의 [[대구시민운동장]] 및 대한방직(구, [[조선방직]] 대구공장). 대한방직의 건너편, 시민운동장의 대각선쪽이 제일모직 대구공장이다.사진 우상단부분]]
 
[[파일:대구_시민운동장.jpg|썸네일|380픽셀|1970년대의 [[대구시민운동장]] 및 대한방직(구, [[조선방직]] 대구공장). 대한방직의 건너편, 시민운동장의 대각선쪽이 제일모직 대구공장이다.사진 우상단부분]]
'''제일모직 축구단'''은 제일모직이 62년 4월 창단하여 운영했던 축구단으로 모기업이 있던 [[대구]]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1960년대에 최초의 지방(대구) 실업팀으로 1970년 [[한국합판]] 축구단이 생기기 전까지 유일한 지방팀이었다. 초기 이렇다할 실업팀이 없던 당시 군제대 선수들의 영입으로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야말로 무주공산에 깃발꽂으면 되던 시대였던 셈. 특히 창단 이듬해인 1963년 [[전국체전]] 우승. [[대통령배전국축구대회]] 우승. 추계실업종합축구선수권 우승. 도시대항축구제전 우승 등 실업팀이 참가 가능한 대부분의 대회를 우승해버리면서 한국 실업축구계를 천하통일 해버렸던 바 있다. [[차태성]], [[문정식]], [[이이우]], [[박경화]] 등을 양성하던 제일모직은 1971년 섬유업계의 전반적인 부진과 경영난을 이유로 그해 12월 31일부로 해체를 선언하고 이듬해 5일 협회에 보고하였다. 당시 대한축구협회와 한국실업축구연맹에서 연쇄 해체를 우려하여 부활을 요청하였으나<ref>실제 이러한 우려는 현실화 되어 3월에 [[한국합판]]이 해체되어 실업축구에 한동안 지방팀은 전무하게 되었다.</ref>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선수단 3명 및 선수 16명 전원은 제일모직 사원으로 입사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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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모직 축구단'''은 제일모직이 62년 4월 창단하여 운영했던 축구단으로 모기업이 있던 [[대구]]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1960년대에 최초의 지방(대구) 실업팀으로 1970년 [[한국합판]] 축구단이 생기기 전까지 유일한 지방팀이었다. 초기 이렇다할 실업팀이 없던 당시 군제대 선수들의 영입으로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야말로 무주공산에 깃발꽂으면 되던 시대였던 셈. 특히 창단 이듬해인 1963년 [[전국체전]] 우승. [[대통령배전국축구대회]] 우승. 추계실업종합축구선수권 우승. 도시대항축구제전 우승 등 실업팀이 참가 가능한 대부분의 대회를 우승해버리면서 한국 실업축구계를 천하통일 해버렸던 바 있다. [[차태성]], [[문정식]], [[이이우]], [[박경화]] 등을 양성하던 제일모직은 1971년 섬유업계의 전반적인 부진과 경영난을 이유로 그해 12월 31일부로 해체를 선언하고 이듬해 5일 협회에 보고하였다. 당시 대한축구협회와 한국실업축구연맹에서 연쇄 해체를 우려하여 부활을 요청하였으나<ref>실제 이러한 우려는 현실화되어 3월 [[한국합판]] 축구단 해체로 이어져 실업축구에 한동안 지방팀은 전무하게 되었다.</ref>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선수단 3명 및 선수 16명 전원은 제일모직 사원으로 입사하도록 하였다.  
  
 
=== 출신 선수 ===
 
=== 출신 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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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경기장 ===
 
=== 홈경기장 ===
60년대 [[실업축구연맹전]]시절에는 중앙개최방식으로 치뤄졌기 때문에 홈경기장이 없었지만 [[대구시민운동장]]이 제일모직 바로 가까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일모직 내에도 잔디축구장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력뿐 아니라 시설면에서도 최상의 팀이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대구시민운동장이 [[홈경기장]]이었고 제일모직내 기숙사 및 잔디축구장이 [[클럽하우스]]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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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실업축구연맹전]]시절에는 중앙개최방식으로 치뤄졌기 때문에 홈경기장이 없었지만 [[대구시민운동장]]이 제일모직 바로 가까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일모직 내에도 잔디축구장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ref>[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637&yy=2010 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 김재하씨가 본 호암은] -2010년 1월 13일, [[매일신문]]- </ref> 실력뿐 아니라 시설면에서도 최상의 팀이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대구시민운동장이 [[홈경기장]]이었고 걸어서 5분거리에 [[클럽하우스]]인 제일모직 기숙사 및 잔디축구장이 있었던 셈.  
  
 
== 에피소드 ==
 
== 에피소드 ==

2013년 9월 25일 (수) 20:47 판

제일모직(制一毛織, CHEIL INDUSTRIES INC.)은 첨단소재 및 패션 사업을 하는 삼성그룹의 자회사로 1962년부터 1971년말까지 축구단을 운영했다. 축구단은 제일모직 또는 일모[1](一毛) 축구단으로 불렀다.

제일모직

제일모직은 1954년 이병철에 의해 창립된 이래 계속 삼성그룹의 주력회사로 자리잡아 오고 있다. 처음에는 모직사업으로 시작하였으나, 합섬 등 직물 전반으로 확장하였으며, 직물사업을 기반으로 1970년대 패션 사업 진출, 1980년대 후반 화학 사업 진출, 2000년대에는 전자소재 산업으로 진출하여 2012년말 기준으로 모직이라는 회사명에 어울리지 않게 직물, 패션사업부분은 30%에 불과하며, 2013년 삼성그룹 후계구도와 관련하여 패션사업부분을 에버랜드로 양도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제 모직이라는 이름을 떼어내야 할 듯. 대구 칠성동[2]에 첫공장인 대구공장을 건립하였고 이 곳을 기반으로 일모축구단이 활동하였다.

연혁

  • 1954년 1월 제일모직공업 주식회사 설립
  • 1955년 12월 대구 칠성동2가에 대구공장 준공(모직)
  • 1963년 4월 일모축구단 대통령배 축구대회 우승
  • 1965년 한국 최초 울 마크 사용권 획득(IWS)
  • 1969년 경산공장 준공
  • 1971년 12월 31일 일모 축구단 해체
  • 1972년 경산공장 분리, 제일합섬(현, 웅진케미칼) 설립
  • 1975년 증권거래소 주식 상장
  • 1976년 제일모직주식회사로 상호 변경, 안양공장 준공(의류패션).
  • 1978년 구미공장 준공
  • 1989년 영문상호 Cheil Wool Textile에서 CHEIL INDUSTRIES INC.로 변경, 여천공장 준공(화학)
  • 1996년 대구공장, 구미공장과 통합 및 이전
  • 1999년 삼성물산 의류부분인 에스에스패션(갤럭시, 라피도 등) 흡수 통합
  • 2000년 화학 분야로 증권거래소 업종 등록 변경, 칠성동2가 옛 대구공장 부지에 대구오페라하우스 기공
  • 2003년 8월 7일 대구오페라하우스 완공, 기증
  • 2013년 9월 23일 제일모직 의류패션사업 부분 1조 500억에 에버랜드로 양도 발표[3]

사업 분야

  • 화학수지
  • 전자소재
  • 섬유,의류,패션
    • 골든텍스(신사복지)
    • 라피도 (위크엔드), 로가디스 (에스에스패션)
    • 빈폴, 후부, 갤럭시

제일모직 축구단

파일:대구 시민운동장.jpg
1970년대의 대구시민운동장 및 대한방직(구, 조선방직 대구공장). 대한방직의 건너편, 시민운동장의 대각선쪽이 제일모직 대구공장이다.사진 우상단부분

제일모직 축구단은 제일모직이 62년 4월 창단하여 운영했던 축구단으로 모기업이 있던 대구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1960년대에 최초의 지방(대구) 실업팀으로 1970년 한국합판 축구단이 생기기 전까지 유일한 지방팀이었다. 초기 이렇다할 실업팀이 없던 당시 군제대 선수들의 영입으로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야말로 무주공산에 깃발꽂으면 되던 시대였던 셈. 특히 창단 이듬해인 1963년 전국체전 우승. 대통령배전국축구대회 우승. 추계실업종합축구선수권 우승. 도시대항축구제전 우승 등 실업팀이 참가 가능한 대부분의 대회를 우승해버리면서 한국 실업축구계를 천하통일 해버렸던 바 있다. 차태성, 문정식, 이이우, 박경화 등을 양성하던 제일모직은 1971년 섬유업계의 전반적인 부진과 경영난을 이유로 그해 12월 31일부로 해체를 선언하고 이듬해 5일 협회에 보고하였다. 당시 대한축구협회와 한국실업축구연맹에서 연쇄 해체를 우려하여 부활을 요청하였으나[4]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선수단 3명 및 선수 16명 전원은 제일모직 사원으로 입사하도록 하였다.

출신 선수

홈경기장

60년대 실업축구연맹전시절에는 중앙개최방식으로 치뤄졌기 때문에 홈경기장이 없었지만 대구시민운동장이 제일모직 바로 가까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일모직 내에도 잔디축구장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5] 실력뿐 아니라 시설면에서도 최상의 팀이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대구시민운동장이 홈경기장이었고 걸어서 5분거리에 클럽하우스인 제일모직 기숙사 및 잔디축구장이 있었던 셈.

에피소드

  • 삼성 라이온즈가 대구에서 창단될 당시 대구에 거점을 두고 있는 삼성계열사가 제일모직뿐인지라 제일모직에서 삼성 라이온즈로 인력이 많이 차출되었다. 이승빈 삼성 라이온즈 사장, 김재하 단장 등. 김재하는 삼성 라이온즈 퇴직후 2011년 대구 FC의 단장이 되기도 하였다. 대구의 축구나 야구에 있어 큰 영향을 미친 셈. 물론 삼성이 대구에 스포츠만 영향을 미쳤겠냐만은...

같이보기

참고

  1. 제일은행 축구단과의 구별을 위해서기도 했고 보통 약자를 사용할 때 앞자를 따서 부르나 앞자를 따면 제모가 되므로 부득이하게 일모가 된듯... 근데 제일은행보다 먼저 창단되었다. -_-;; 석유공사가 유공이 된 이유와 비슷하다.
  2. 현재에도 제일모직 공장터는 남아 있는데 대구 오페라하우스 및 홈플러스 1호점인 대구 칠성점을 포함한 부지가 모두 제일모직 대구공장터였다. 칠성동과 침산동 일대 10만제곱미터 규모. 제일모직이나 삼성입장에서는 그 금싸라기 자리에 아파트를 짖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으나 대구 지역 여론(대구가 삼성을 키워줬는데 삼성 상용차 이후로 대구에 삼성관련 기업이 하나도 없고 지역에 무심하다)으로 인해 여론을 살피며 간(대구 오페라 하우스 건립 기부 등)만 보고 있다. 사실 상업시설 개발안이 십수년간 있었으나 대구의 경기문제 등 복합적인 문제가 있다.
  3. 제일모직, 패션사업 에버랜드에 넘겨..소재사업 주력 -연합뉴스, 2013년 9월 23일-
  4. 실제 이러한 우려는 현실화되어 3월 한국합판 축구단 해체로 이어져 실업축구에 한동안 지방팀은 전무하게 되었다.
  5. 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 김재하씨가 본 호암은 -2010년 1월 13일, 매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