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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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태성 (1934년 10월 18일 ~ 2006년 11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 선수이자 축구인이다.


프로필[편집]

  • 이름 : 차태성
  • 출생일 : 1934년 10월 18일
  • 사망일 : 2006년 11월 18일
  • 신체 : 169cm / 66kg (선수 시절)
  • 국가대표 경력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아시아예선 대표
1956년 AFC 아시안컵 본선 대표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1960년 로마 올림픽 아시아예선 대표
1960년 AFC 아시안컵 본선 대표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1964년 도쿄 올림픽 예선ㆍ본선 대표
1956년 ~ 1966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통산 A매치 75경기 출장 17골)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학창 시절[편집]

평양 경제리 (현 평양직할시 중구역 경상동) 출신으로 집 평수만 150평이 넘었으며, '동명면옥'이라는 음식점을 경영하는등[1] 평양에서 손꼽히는 자산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후 평양 광성중학교 시절부터 축구 선수로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였지만, 평양제일고 2학년 재학 중 6.25 동란이 터졌고 1.4 후퇴때 혈혈단신으로 월남을 하게 된다. 당시 그가 손에 쥐고 온 것은 축구화 한켤레와 옷가지가 전부였다고. 이후 부산까지 내려가 피난 생활을 하던 차씨는 휴전 협정 후 서울로 올라와 중대부고에 편입, 이후 연세대학교 교육학과에 진학하여 학업 생활을 하던 도중 다시 축구 선수의 길을 걷기에 이른다. 오랫동안 축구를 하지 못한 상태였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타고난 감각을 바탕으로 연고전에서 최광석 선수와 함께 고려대학교를 유린하는데 성공. 단박에 주목을 받았고, 그 결과 1956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에 발탁되기에 이른다.


성인 시절[편집]

연세대학교 3학년 재학 중, 특무대에 입대한 차선수는 최정민이수남 등 당대의 플레이어들과 함께 특무대 축구단의 전성기를 지휘하였으며 국가대표에도 붙박이로 발탁되어 각급 대회를 소화하였다. 이후 1963년 예편한 차선수를 제일모직이 영입하였으며,[2] 제일모직은 차태성 선수를 앞세워 63년 4개 대회를 석권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하지만 1964년 도쿄 올림픽대표팀에 차선수는 주장으로 참가하였는데 이 대회에서 한국은 3전 전패를 기록하였고, 특히 아랍공화국에 0:10 대패, 경기 도중 제일교포 응원단과 충돌이 빚어지는 등 온갖 흑역사를 작성한 탓에 그 충격으로 차선수는 도쿄에서 귀국 후 1차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3]

하지만 1965년 차씨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은 서울시경 축구단이었다. 당시 갓 창단된 축구팀이었던 서울시경은 차태성 등 노장 선수들에게 영입을 제의했고, 이를 차씨가 승낙하면서 다시 선수 생활에 복귀하였던 것. 이후 서울시경에서 센터 포워드 겸 코치로 활약하며 발군의 활약을 보여준 차선수는, 메르데카컵을 앞두고 있었던 한국 대표팀에 발탁되어 선수 생활 황혼기를 불태우다, 1967년 겨울 서울시경 축구단이 해체되자 35세의 나이로 선수 생활을 정리하였다.


은퇴 이후[편집]

은퇴 이후 서울시경 소속 경찰공무원으로 활동하던 차씨는, 1975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사업가로써 활동하였다고 한다. 이후 2006년 미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73세.


플레이 스타일[편집]

  •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다. 국가대표에서는 풀백하프백을 맡는 경우가 많았으나, 실업축구 소속팀에서는 센터 포워드나 인너로 뛰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이후 국가대표 내에서 입지가 두터워지자, 국가대표 내에서도 센터 포워드를 맡는 경우가 늘어났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1호 멀티 플레이어이자, 유상철 선수의 먼 조상인 셈..


에피소드[편집]

  • 차태성 씨의 아버지가 1930년대 후반 평양 축구단에서 활동하였던 차관영 씨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적부터 차태성 씨는 축구공을 차며 놀았다고.
  • 서른살만 되도 은퇴를 종용받았던 당대 축구계에서, 35세의 나이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며 서성오 선수와 함께 강철 노장으로 불리었다. 여기에 한차례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했다가 복귀해서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국가대표에도 재발탁되는등 각종 기록을 많이 남겼다.
  • 엘리트 이미지와 달리, 성격이 불같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특무대 복무 시절과 예편 이후 선수 시절, 그 성미로 인해 심판이나 타 팀 선수들과 충돌이 잦았는데 이로 인해 출전 정지 등 처벌을 받았음에도, 워낙 대표팀 내에서 비중이 막강하다보니 얼마 안가 다시 국가대표에 복귀하고는 했다. 대표적으로 1962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도중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멱삽을 잡고 소란을 부려 무기한 출전 금지를 당하기도 했고,[4] 1960년 로마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대만에게 몰수패를 당할 당시에도, 영국인 주심에게 제일 먼저 달려든 선수 중 한명이 차태성 씨였다고 한다..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참고[편집]

  1. 우연의 일치인지 차씨 고향인 경제리 주변에는, 오늘날 북한을 대표하는 음식점인 옥류관이 들어서있다.
  2. 당시 제일모직은 차태성 뿐만 아니라 특무대에서 예편하는 다수의 선수들을 영입하였다. 때문에 특무대 측은 이러다 3류 축구단으로 전락하겠다고 우려를 표했을 정도.. 蹴球(축구)선수 大異動(대이동) 第一毛織(제일모직)팀 훨씬補強(보강) 실제로 특무대 축구단은 이후 별다른 성적을 기록하지 못하다, 2년 후에 해체된다.
  3. 이 때 차태성 선수 뿐만 아니라 우상권 선수 등 다른 선수들도 은퇴를 선언한다. 당시만 해도 적지나 다름없었던 일본에서 망신을 당한 셈이니 자존심 강한 선수들로써는 참을 수 가 없었을듯..
  4. 관련 기사 : 車泰成選手(차태성선수)의 無期出場禁止(무기출장금지) 무려 이 때 심판이 국가대표 수문장 출신인 홍덕영 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