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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칫통 (토론 | 기여)님의 2012년 5월 4일 (금) 00:4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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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중석(大韓重石, Korea Tungsten)은 대한민국의 텅스텐 채굴 국영기업이자 1960년대 국내에서 가장 강력했던 실업 축구단이었다. 중석(重石)은 텅스텐의 한자어. 현재 대구텍의 전신이다.

대한중석

대한중석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 강원도 영월의 상동에서 텅스텐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1936년 텅스텐 광산개발을 위해 일제에 의해 소림광업(小林鑛業)이 설립되어 상동 및 달성광산이 개발되었으며, 해방 후 귀속재산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인수되었다. 전세계 매장량의 8%를 점하는 최대의 단일 중석광구이던 상동광산과 달성광산을 기반으로 냉전시기 제1세계의 공급량의 최대 20%까지 차지하며, 한국정부의 달러 공급원이 되었다. 그러나 1952년 6월 중석불사건[1]으로 인해 그해 9월 대한중석광업㈜이 설립되었다. 이승만 정권 말기에는 한때 대한민국 전체 수출액의 약 60%까지 차지했던 거대 국영기업으로 성장하였지만 방만한 경영으로 만성적자를 시달렸다. 중석수출은 이렇다할 산업이 없는 한국에 있어 최대 달러공급원이었으므로 쿠데타 성공이후 집권한 박정희는 신뢰하던 박태준(당시 육군소장)을 예편시켜 1964년 대한중석 사장에 임명하였다.[2] 그리고 기대에 발맞춰 박태준은 부임 1년만에 회사를 흑자로 만들었다. 196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와의 합작투자(정부 75%, 대한중석 25%)로 포항제철(현 포스코)이 설립되었으며, 박태준은 포항제철 사장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1975년에는 달성광산이 바닥을 드러네 폐광되면서, 서울에 있던 본사가 그 자리(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로 옮겨가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80년대 이후 텅스텐 세계 최대매장국인 중국이 시장개방정책으로 세계 텅스텐 시장에 뛰어들게 되면서 사양산업이 되어 1994년, 상동광산이 폐쇄되고 건설부분과 초경사업부분은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정책으로 인해 거평그룹으로 인수되었다. 이후 외환위기로 인해 거평그룹이 부도처리되고 대한중석은 IMC그룹에 인수되어 사명을 대구텍(TaeguTec)으로 변경한다. 2006년, 세계적인 투자가인 워렌 버핏의 회사 버크셔 해서웨이가 대구텍의 모기업 IMC그룹의 지분 80%을 인수하면서 대구텍의 주인이 되었다.

대한중석 축구단

대한중석 축구단은 1956년 창단된 실업축구팀으로 중석 사장으로 부임한 박태준에 의해 1965년부터 대대적인 개편을 통해 국내 최강팀의 면모를 보이다 1972년 대한중석의 경영합리화를 빌미로 해체되었다.

역사

태동 및 발전

1952년부터 대한중석 창립시부터 이미 회사내에 축구단이 존재했으나 직장동호회 수준이었으며, 1956년 축구단이 창단된 이후에도 영월 상동광산 주변의 환경이 열악하여 제대로된 운동장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훈련을 하였으며, 훈련 외 근무시간에는 광부들과 함께 채굴 작업에 선수들이 참가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3] 축구에 관심이 많던 박태준이 1964년 대한중석에 부임한 후 회사가 흑자전환 되는 등 안정화되자 이전부터 구상해뒀던 축구팀을 개편,정비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팀이 되었다. 당시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한홍기씨를 감독으로 내정하고, 국가대표선수였던 함흥철, 김정석, 조윤옥, 석효길, 황종현, 최재모, 김창일, 박수일, 최상철 등 내로라하는 스타급 플레이어들을 보유하여 국내 최고급 대우와 체계적인 훈련 스케쥴로 창단하자마자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강팀으로 발돋움했다. 1965년과 1966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를 연거푸 우승했고, 홍콩에서 열렸던 국제 대회를 참가한 기록도 남아있다.

쇠퇴 및 해체

1966년 런던 월드컵에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이 8강에 오르는 대파란을 일으키자, 1967년 2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의 지시로 창설한 양지 축구단에 대한중석 핵심 전력을 차출당하면서 전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그리고 축구단의 후원자이던 박태준이 1968년 포항제철로 옮겨감에 따라 대한중석 축구단의 존립 기반이 흔들렸다. 결국, 1972년 경영상 흑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영합리화라는 명목으로 주 2일만 축구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근무를 하라는 회사의 방침에 선수들이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하면서 축구단은 해체되고 말았다. 해체 1년후인 1973년, 포항제철소 1기가 준공되자마자 박태준포항제철 축구단를 창단함에 따라 대한중석 축구단의 잔류 멤버와 스탭진, 양지 축구단이 해산되면서 예편한 이회택 등 신진 멤버가 합류해 포항제철 축구단을 구성했다. 감독부터 코치, 선수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멤버구성이 대한중석 축구단과 상동해, 대한중석 축구단을 포항 스틸러스의 전신으로 보기도 한다.

홈구장

강원도 영월에 있을 당시에는 축구장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논두렁에서 훈련하는 안습한 시절도 있었으나 박태준이 부임한 이후 대한 중석본사가 있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한 대한중석구장을 홈으로 사용했다. 론그라운드나이터시설이 갖추어진 당시로선 최신식 구장이었다. 시설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효창구장과 경기가 중첩될 시 금융단리그의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중석팀이 해체된 이후에는 당시 원정온 해외 국가대표팀의 연습구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주요 선수

같이 보기

참고

  1. 중석불(重石弗)은 중석을 수출하여 번 달러라는 뜻으로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정권이 이 중석불로 밀가루 및 비료를 구입하여 흉작과 비료부족으로 궁핍한 삶을 살고 있던 농민에게 비싼값에 팔아 폭리를 취한 사건으로 이승만정부 최대의 비리사건 중 하나이다.
  2. 박태준은 쿠데타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박정희는 쿠데타 실패시를 대비하여 전날 가족들을 박태준에 맏길정도로 신뢰하던 사이였다.
  3. 김현회 '철강왕' 박태준의 못 말리는 축구사랑 일대기 -2011년 5월 18일,네이트 김현회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