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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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아이파크의 선수이다.

프로필

이름 : 김상록

생년월일 : 79년 2월 25일생 (32세)

포지션 : MF

소속팀 변천사 : 고려대 -> 포항 -> 광주상무 -> SK -> 인천 -> 부산

국가대표 경력 : 98년 청소년대표, 2000년 올림픽 대표 선발, 2001년 동아시아 국가대표

K리그 경력 : 239경기 출장 31골 22도움

설명

부산 아이파크에 이번 시즌 입단한 선수로 포지션은 공격형미드필더, 쉐도우 스트라이커를 소화할 수 있다.

1. 고려대 시절

김상록 선수는 왜소한 체격 (173cm 67kg) 임에도 불구하고, 드리블과 탁월한 골 결정력으로 대학무대를 평정했었다.

특히 볼을 논스톱으로 받아서 슈팅으로 연결하는 능력이 탁월해, 왼발의 킬러로 통했다. (대부분의 득점이 왼발에서 나온다.)

당시 김상록과 함께 고려대 공격을 주도했던 선수가 고민기 선수인데, 두 선수는 고려대에서의 활약을 발판으로
나란히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에 발탁되기도 했었다.

특히 2000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결승전에서 김상록 선수는 40m 드리블에 이은 강슛으로 결승골을 터뜨려
동 대회 우승과 MVP를 수상했다.

2. 화려한 신인 시절

2001년 드래프트 (당시 드래프트는 2001년을 끝으로 폐지가 예정돼있었다.)에서 김상록 선수는

포항에 1순위로 지명되어 입단했다. 포항은 2000시즌 10개 팀 중 9위를 기록해, 드래프트 우선 지명권을 얻었고
최순호 감독은 모든 팀이 1순위로 탐내고있었던 김상록을 선택했던 것이다.

포항의 기대에 부응하듯 김상록 선수는 데뷔 시즌 매우 인상깊은 활약을 남겼다.

데뷔 후 6경기째만에 K리그 전북전 50m 단독 드리블에 이은 칩샷으로 2:1 결승골을 터뜨리며 깜짝 데뷔골을 신고하더니,
더욱 현란한 개인기와 한 박자 빠른 슈팅으로 최순호 감독의 눈도장을 받아내,
당시 포항의 공격형 미드필더였던 자심을 밀어내고 주전으로 등극했다.

리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국가대표 선발까지 되면서 김상록의 미래는 한층 밝아보였다.

다만 8월이 지나면서 김상록의 페이스가 떨어지고 포항의 기세가 한풀 꺽이면서 (8경기 연속 무승 기록)
김상록은 서브로 밀려나버렸다. 그러나 신인임을 감안하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34경기 출장 4골 1도움)

3. 계륵

2002 시즌 아디다스 컵에서 꾸준히 선발을 꿰차며 최순호 감독의 기대를 받았으나, 이동국의 부상과
고정운의 은퇴, 나희근, 윤보영의 부진 등 포항 공격진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김상록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특히나 김상록에게 공간을 만들어줄 타겟 스트라이커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점은 치명적인 약점이었고,
상대팀 수비수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2002시즌 리그 6경기 1골 1도움에 그치며 최순호의 전력 구상에서 밀려나더니,

2003시즌부터는 난데없이 윙어로 돌변해 장기였던 골결정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무미 건조한 크로스만 남발하기에 이르렀다. 선수로서의 자신감이 바닥을 길 수 밖에 없었다.

결국 2004시즌을 앞두고 광주 상무 입대를 결정하고 만다.

4. 상무 시절

상무에 입단하고서 한 때는 팀 사정상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뛰기도 하였으나,

2005시즌부터 제 위치인 공격형 미드필더와 쉐도우 스트라이커를 오가며 안정감을 되찾은 김상록 선수는
전기리그에만 3골 3도움을 올리며 정윤성 선수에 이어 팀 내 최다 공격포인트를 기록했다.

어느 정도 슬럼프를 극복하며 자신감을 되찾은 김상록 선수는 전역과 동시에 고기구와 트레이드되어
2006시즌부터 SK에서 뛰게되었다.

5. SK 시절

사전 설명 하나 없이 SK로 트레이드된 김상록 선수는 심적으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이 때문에 SK 프론트와 시즌 내내 마찰을 빚었다.

그러나 이런 외부조건의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김상록은 데뷔 후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SK의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32경기 출장 6골 3도움)

2006시즌 종료와 함께 수도권 팀으로의 이적을 요구한 김상록 선수는, 마침 미드필더를 찾고 있던 인천에게 포착.
결국 이요한 선수와의 트레이드를 조건으로 1시즌만에 SK에서 인천으로 이적했다.

6. 인천에서의 포텐 폭발

인천에서 맞이한 첫시즌이었던 2007년은 김상록 선수에게 있어 최고의 한 해였다.

박이천 감독대행은 매우 공격적인 포메이션을 구사했는데, 김상록 방승환, 데얀으로 3톱을 구성하고
위 3명을 제외한 윙어와 중앙미들은 이들에게 볼배급을 집중토록하는 진용을 갖추었다.

이 전술의 승패는 데얀의 득점력과 방승환의 멀티플레이어 자질 그리고 김상록의 개인기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 전술적 승부수는
대성공을 거두어, 인천 득점력은 06시즌 대비 50% 가량 증가했다. (대신 수비의 약화는 피할 수 없었지만)

특히 김상록 선수의 대약진은 단연 돋보였는데 2007시즌 10골을 몰아넣으며 국내 선수 중 이근호 선수와 함께 공동 1위에 랭크되었고
도움 부문에서도 6도움을 올리며 인천 득점의 30% 가량을 김상록 선수가 전담했다. (인천의 득점 53골 중 16개가 김상록 선수의 발끝에서 나온 것이다.)

공격포인트 총합은 16포인트로 같은 해 우성용 선수의 18포인트에 이어 국내 선수 2위에 랭크되는 등,
2007시즌 K리그의 숨은 MVP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대활약을 펼쳤다.

7. 2년간의 허송세월과 부산 입단

박이천 감독대행과 달리, 장외룡 감독에게 김상록의 역할은 애매하기 그지 없었다.

더군다나, 단짝 플레이어였던 데얀의 이적과 라돈치치의 부진등은, 김상록의 활동폭을 더욱 좁게 만들었고,
이는 김상록 선수 개인의 부진뿐만 아니라 인천 공격진의 전반적인 하향 평준화를 낳았다.

결국 장외룡 감독은 김상록을 2군으로 내려보냈고, 그 해 인천은 극단적인 수비축구와 저조한 득점으로 관중수 격감을 겪었다.

2008시즌 종료와 함께 장외룡 감독이 J리그 오미야 감독으로 떠나고, 인천에 새로 부임한 페트코비치 감독은
여전히 김상록을 전력외로 분류했다. 1년여간의 공백기 동안 체력이 눈에 띄게 저하됐을뿐만 아니라,
페트코 감독의 전술 성향 자체도 장외룡 감독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을 2군에서 보낸 후, 자유계약대상자로 풀린 김상록 선수는, 부산으로 이적했다.

8. 부산 입단과 향후 전망

본래 정성훈 선수와의 협력 플레이를 상정하고 데려온 선수였으나, 황감독의 눈에는 차지 않았는지,
개막전 이후로 계속 후보멤버에는 이름을 올리고 있으나, 정작 출전한 경기는 단 한 번도 없다. (4라운드 현재까지)

아무래도 컨디션이 덜 올라왔기 때문으로 풀이되는데, 이번 5라운드 성남전에서 정성훈 선수가 경고누적으로 결장하는 관계로
양동현 선수와 김상록 선수가 선발로 나올지 않을까 예상한다. 그 경기를 봐야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하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