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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일 (일) 21:46 판
김병지(金秉址, Kim, Byung Ji, 1970년 4월 8일~)는 대한민국 국적의 축구선수로, 1992년부터 2012년 현재까지 K리그에서 활약중인 전설적인 골키퍼이다.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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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프로필
유소년 생활
경상남도 밀양시 출신으로 밀양초등학교, 밀양중학교, 부산 알로이시오고등학교[4]를 나왔다. 밀양초 시절까지 육상선수로 활동하였으며, 중학교 시절부터 축구 선수의 길을 걸었다. 밀양중 졸업 후, 마산공업고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가정 형편상 축구부 회비를 낼 여력이 없었다고. 결국 김병지는 국비 지원을 조건으로 부산 알로이시오기계고등학교로 전학을 결정한다.[5] 알로이시오 시절부터 골키퍼로 활약했지만, 소년의 집 출신이란 삐뚤어진 세간의 시선속에 김병지 선수를 받아줄 축구팀은 없었다. 결국 김병지 선수는 고등학교 졸업 후, 창원 기계공단의 금성산전[6]에서 용접공으로 근 2년을 생활하였다.
K리그
현대, 울산 시절
용접공으로 끝날뻔했던 김병지 선수의 인생은 1989년 상무 축구단에 합격하면서 일대 전환을 맞이한다. 상무 시절인 1991년 추계실업축구연맹전 국민은행 축구단 과의 결승전에서, 김병지 선수는 국민은행의 파상공세를 잘 막아내었을 뿐 아니라, 연장전후 치루어진 승부차기에서 국민은행 키커의 PK를 막아내며 상무를 우승으로 이끌었고, 동대회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며 프로팀들의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이후 상무 전역과 동시에, 당시 현대 호랑이 축구단의 감독이었던 차범근 씨의 눈에 들어 월봉 80만원의 연습생 신분으로 현대에 입단하게 되었다. 이것이 1992년의 일이었다. 당시 현대 호랑이의 1선발 골리는 국가대표 최인영 씨였는데, 최선수는 1994년 미국 월드컵 대표로 발탁되어 국가대표 훈련에 불려다니는 통에 현대에서 출장하지 못하는 시간이 더러있었고 이러한 기회를 틈타 김병지 선수는 1군 무대에서 출장경력을 쌓으며 빠르게 프로 무대에 안착할 수 있었다. 특히 1992년 열린 아디다스 컵대회에서 승부차기만 3개를 막아내는 등 PK 방어에서 강점을 보인 김병지 선수는 무서운 새내기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특히 1993년 K리그는 무승부가 폐지되고 90분 전후반 경기에도 승부가 나지않을 경우, 승부차기로 이어지는 희한한 제도를 채택했고 이에 김병지 선수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후 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알까기를 범하며 세간의 혹독한 비판을 당했던 최인영 선수는 쓸쓸히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말았고, 이후 무주공산이 된 현대의 1선발 자리를 차지한 김병지 선수는 2000년까지 울산 현대에서 활약하며 1996년, 울산 현대의 창단 이후 첫번째 우승을 견인하며 K리그 무대 최정상급 골리임을 입증해보였다.
포항 시절
FC GS 시절
경남 시절
플레이 스타일
골키퍼 치고는 활동반경이 굉장히 넓다. 마치 스위퍼가 한명 더 있는것 처럼 많이 뛰쳐나오는데 그로 인해 아찔한 위기를 만들기도 하지만 빈도는 낮은 편. 나이가 꽤 있지만 여전히 날렵하고 판단이 빨라서 슈퍼세이브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
에피소드
- 2001년 1월 파라과이전에서 평소처럼(?) 볼을 몰고 중앙선까지 뛰쳐나가는 기행을 선보이자 당시 국가대표 감독인 히딩크감독이 격분, 그 이후 이운재선수가 국가대표 GK로 발탁되면서 김병지 선수는 2인자로 밀려나게 된다. 이후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직후 열린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에서 이운재와 교체출장 했는데 하필 호나우딩요와의 PK 차기 직전 상황에서 교체되는 바람에 꼼짝없이 실점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2002년 이후로 김병지는 세대교체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함께 국가대표에서 밀려나게 된다.
-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객원해설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제대로 적응을 못하는 모습이었으나 점차 현역 선수답게 맥을 잘 짚어주는 해설을 하면서 제법 인기가 오르기도. 선수 생활이 끝나고나면 해설을 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기도 하다. 여기에다 칼럼도 가끔 네이트에 기고 하시고는 하는데, 상당히 수준이 높다. 말도 잘하고 글도 잘쓰고 축구도 잘하고..[7]
- 지금은 많이 얌전(?)해지셨지만, 포항 시절까지만 해도 성질도 불같은 골키퍼로 한가닥하셨다. 뚜따랑 주먹다짐을 벌인 사건은 애교일 정도. 때문에 김현석, 송주석, 김병지가 버티고있던 1990년대 울산 현대의 형님 축구는 정말 후덜덜했었다 -_-..; 물론 지금은 온화한 삼촌 카리스마(?)로 젊은 경남 선수단의 중심을 잡아주며 활약 중이다.
경력
- 1989 ~ 1990 : 상무 불사조 / 실업 축구
- 2001 ~ 2005 : 포항 스틸러스 / K리그
- 2006 ~ 2008 : FC GS
- 2009 ~ 현재 : 경남 FC / K리그
같이 보기
외부링크
- [1] (경남 FC 의 선수소개)
참고
- ↑ 2012년 6월 27일 달성.
- ↑ 헤딩으로 필드골을 넣은 골키퍼는 한명이 더 있다. 바로 서동명이다. 서동명은 2000년 7월 16일 성남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성남 일화와의 경기에서 1-2로 뒤지던 로스타임 2분께 마지막 코너킥 찬스에서 최전방까지 달려나와 동점 헤딩골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 ↑ 플레이에 집중하겠단 뜻인지 어느샌가 코칭스태프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 ↑ 구 부산 소년의 집.
- ↑ 알로이시오고가 본래 고아들을 맡아서 교육하는 기독교계 학교인지라 알로이시오고를 나온 김병지 선수도 고아출신인줄 아는 사람들이 더러있다. 그러나 여기서 확인할 수있듯 김병지 선수는 고아 출신이 아니다.
- ↑ 현재의 LS산전
- ↑ 네이트 김병지 칼럼 리스트 : http://sports.news.nate.com/spopub/column?cp=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