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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에서 은퇴한 이원식은 은퇴 후 모교인 [[청구고등학교]] 축구부 코치로 부임하여 후배들을 가르쳐오다, 지난 2008년부터는 SK 유나이티드 유소년 축구단 감독에 선임되어 제주도 지역 유소년 축구를 육성하는데 힘을 보태기도. 그러다 [[하재훈1|하재훈]] 감독의 부름을 받아 2009년부터 [[천안시청 축구단]]의 플레잉코치로 몸담으며 [[남기일]] 선수와 함께 내셔널리그에서 선수생활 황혼기를 불태웠으며,<ref>남선수는 성남 일화 천마에서 활동하다 천안시청으로 내려와 내셔널리그 무대를 쓸고다녔지만, 이원식 선수는 대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정리한 지 5년여만에 그라운드로 복귀했던 것이기 때문에, 남선수만큼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리그에서만 2경기를 출장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기도..</ref> 2010년 최종 은퇴 후 현재는 청구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부임하여 팀을 지휘중에 있다.
 
프로에서 은퇴한 이원식은 은퇴 후 모교인 [[청구고등학교]] 축구부 코치로 부임하여 후배들을 가르쳐오다, 지난 2008년부터는 SK 유나이티드 유소년 축구단 감독에 선임되어 제주도 지역 유소년 축구를 육성하는데 힘을 보태기도. 그러다 [[하재훈1|하재훈]] 감독의 부름을 받아 2009년부터 [[천안시청 축구단]]의 플레잉코치로 몸담으며 [[남기일]] 선수와 함께 내셔널리그에서 선수생활 황혼기를 불태웠으며,<ref>남선수는 성남 일화 천마에서 활동하다 천안시청으로 내려와 내셔널리그 무대를 쓸고다녔지만, 이원식 선수는 대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정리한 지 5년여만에 그라운드로 복귀했던 것이기 때문에, 남선수만큼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리그에서만 2경기를 출장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기도..</ref> 2010년 최종 은퇴 후 현재는 청구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부임하여 팀을 지휘중에 있다.
 
  
 
== 플레이 스타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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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4월23일 전북과의 익산경기에서 1-2로 뒤지던 후반직전에 2-2 동점골이 들어갔고, 문전앞에 너무 많은 선수들이 있어서 누가 득점을 했는지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연장전 시작직전에 연맹기록원은 [[부천 SK]] 주무에게 확인을 요청, 이원식의 골로 확인을 해주었고 이원식의 골로 기록이 됐다. 하지만 비디오 분석 결과, 이원식 선수는 득점과는 무관한곳에 위치해 있는게 밝혀졌고, 득점은 [[윤정춘]]선수로 밝혀졌다. 다음날 프로축구연맹은 상벌위원회를 열어 이원식 선수에게 벌금 80만원, 부천구단에게는  120만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원식 선수는 이후 비난에 마음고생이 심했고 이후 한일정기전이 열리면서 여론의 관심이 한일전에 쏠리자 한일전에 감사할 정도였다고.... 이후 유로 2000 8강전에서 유고에게 4골을 넣어 클루이베르트가 6골로 득점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나 경기직후 자신의 득점이 아닌 유고의 자책골이라 양심선언을 하면서 그게 사실로 밝혀지자  유고의 사보 밀로세비치(5골)와 함께 득점 공동선두로 내려앉으면서 다시 한번 주목을 받기도 했다. <del>안습...</del> 이원식 선수는 상벌위원회에서 "축구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큰 죄를 지었다. 정말 면목이 없다. 모든 사람이 맞다고 해도 내가 아니다라고 말했어야 할 상황에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 그대로 돼 버렸다."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ref> 당시 보도자료 : 프로축구 이원식 선수 가짜골 소동 큰 파문[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0/1861683_13452.html]</ref>
 
* 2000년 4월23일 전북과의 익산경기에서 1-2로 뒤지던 후반직전에 2-2 동점골이 들어갔고, 문전앞에 너무 많은 선수들이 있어서 누가 득점을 했는지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연장전 시작직전에 연맹기록원은 [[부천 SK]] 주무에게 확인을 요청, 이원식의 골로 확인을 해주었고 이원식의 골로 기록이 됐다. 하지만 비디오 분석 결과, 이원식 선수는 득점과는 무관한곳에 위치해 있는게 밝혀졌고, 득점은 [[윤정춘]]선수로 밝혀졌다. 다음날 프로축구연맹은 상벌위원회를 열어 이원식 선수에게 벌금 80만원, 부천구단에게는  120만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원식 선수는 이후 비난에 마음고생이 심했고 이후 한일정기전이 열리면서 여론의 관심이 한일전에 쏠리자 한일전에 감사할 정도였다고.... 이후 유로 2000 8강전에서 유고에게 4골을 넣어 클루이베르트가 6골로 득점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나 경기직후 자신의 득점이 아닌 유고의 자책골이라 양심선언을 하면서 그게 사실로 밝혀지자  유고의 사보 밀로세비치(5골)와 함께 득점 공동선두로 내려앉으면서 다시 한번 주목을 받기도 했다. <del>안습...</del> 이원식 선수는 상벌위원회에서 "축구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큰 죄를 지었다. 정말 면목이 없다. 모든 사람이 맞다고 해도 내가 아니다라고 말했어야 할 상황에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 그대로 돼 버렸다."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ref> 당시 보도자료 : 프로축구 이원식 선수 가짜골 소동 큰 파문[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0/1861683_13452.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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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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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3일 (일) 21:14 기준 최신판

파일:이원식.jpg
부천 시절 이원식

이원식(1973년 5월 16일~)은 대한민국 출신의 축구선수로 1996년부터 2006년까지 K리그 에서 활동한 공격수이다.

K리그 역사상 슈퍼서브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선수 중 하나다.



프로필[편집]

  • 이름 : 이원식
  • 출생일 : 1973년 5월 16일
  • 신체 : 172cm / 65kg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 리그 기록
소속팀 리그 연도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부천 SK 부천 SK K리그 1996 21 21 7 1 2 0
1997 29 14 11 2 4 1
1998 26 19 10 3 1 0
1999 38 31 9 4 2 0
2000 32 33 13 1 1 0
2001 29 27 5 2 3 0
2002 29 27 4 2 2 0
2003 38 35 10 2 4 0
FC GS FC GS 2004 10 8 1 1 0 0
2005 17 17 3 0 5 0
대전 시티즌 대전 시티즌 K리그 2006 1 1 0 0 1 0
Teamlogo ccfc.png 천안시청 축구단 KNL 2010 2 2 0 0 0 0
통산 K리그 - 270 233 73 18 25 1
KNL - 2 2 0 0 0 0
K리그 통산 기록은 리그컵 기록 포함. 2014년 9월 1일 기준


지도자 프로필[편집]

연도 소속팀 직책
2007 청구고등학교 축구부 코치
2008 SK 유나이티드 SK 유나이티드 유소년 축구단 감독
2009 ~ 2010 천안시청 축구단 플레잉코치
2010 ~ 2014 청구고등학교 축구부 감독
2015 SK 유나이티드 SK 유나이티드 U-15 감독
2016 ~ 2017 SK 유나이티드 SK 유나이티드 U-18 감독


유소년 생활[편집]

대구광역시 출신으로 반야월초등학교, 협성중학교, 청구고등학교와 서울 한양대학교를 졸업했다.


프로 생활[편집]

1996년 드래프트에서 부천 유공에 2순위로 지명되어 입단하였다. 유공 입단 후, 96년 4월 4일 아디다스 컵대회를 통해 리그 데뷔전을 치루게 되는데.. 이 경기에서 후반 9분 교체투입된 이원식은 윤정환의 패스를 받아 0:2로 끌려가던 경기의 만회골을 넣었고, 후반 종료 직전에는 결승골까지 뽑아내며 2:3 역전승을 이끌며 영웅으로 등극했다. 한마디로 데뷔전부터 슈퍼 조커였던셈. 이 날의 활약이후 이원식 선수는 니폼니쉬 감독의 눈도장을 받아냈을뿐만 아니라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을 준비중이던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의 호출로 올림픽대표까지 발탁되기에 이른다. 이후 꾸준한 활약을 보였지만, 항상 조커의 지위를 벗어나지 않았기에 팬들은 이원식 선수가 체력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을 보냈고, 이 때문에 이원식 선수는 잠시 번민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윤환 당시 부천 감독은 이원식 선수는 충분히 베스트 11에 들어갈 기량을 갖고있다. 하지만 승부를 결정지어야할 순간에 가장 폭발력있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선수가 이원식이다. 라며 격려하며 세간의 입방아를 잠재웠다.

2003시즌 종료 후, FC GS로 이적료 5억원 연봉 2억원 3년 계약 조건으로 FA 이적하였다. 당시 이원식 선수는 2003년 FA컵 4강전 對 전북 현대 전에서 심판에게 욕설을 한 것 때문에 6개월 출전 정지 징계를 받은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FC GS는 이원식 선수에게 거액을 제시했던 것. 이후 2004년 4월 말부터 경기를 소화했으나, 부천 시절의 파괴력을 보여주지는 못하였고 이후 2005년 GS에서 퇴단 후 06시즌 대전에서 잠깐 활동한 뒤 프로 생활을 정리하였다.


은퇴 이후[편집]

프로에서 은퇴한 이원식은 은퇴 후 모교인 청구고등학교 축구부 코치로 부임하여 후배들을 가르쳐오다, 지난 2008년부터는 SK 유나이티드 유소년 축구단 감독에 선임되어 제주도 지역 유소년 축구를 육성하는데 힘을 보태기도. 그러다 하재훈 감독의 부름을 받아 2009년부터 천안시청 축구단의 플레잉코치로 몸담으며 남기일 선수와 함께 내셔널리그에서 선수생활 황혼기를 불태웠으며,[1] 2010년 최종 은퇴 후 현재는 청구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부임하여 팀을 지휘중에 있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작은 체구를 가졌지만 뛰어난 득점력을 지니고 있어, 주로 후반전에 교체 출장하였음에도 무시무시한 득점능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원샷원킬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던 선수. 특히 2000년 부천 SK는 조윤환 감독의 지휘 아래 K리그 준우승을 거두게되는데 당시 부천의 공격 전술은 전반 이성재, 후반 이원식 으로 정형화되어있었음에도 상대팀들은 알고도 못막는 수준으로 털렸던바 있다.


에피소드[편집]

  • 주로 교체 자원으로 투입되었기 때문에 체력이 약한것 아니냐는 오해도 있었지만 전혀 그렇지않다. 오히려 서브는 짧은 시간안에 모든걸 쏟아내야 하기 때문에 집중력과 체력이 더 요구된다는게 이원식 선수의 지론. 120분동안 뛸 수 있는 체력을 갖추고 그 에너지를 후반 45분동안 다 쏟아낼 수 있는 공격수 라고 이원식 선수가 자신의 플레이스타일을 정리한바 있다.
  • 위에서 언급한것처럼 체력이 워낙 좋은 선수였기 때문에 2004년 난지도 이적 후 조광래 감독의 권유로 윙백을 소화한바 있다. 이 때문에 아연실색한 축구팬들은 윙백 제조기 조광래라는 이미지를 공고화하기에 이른다.
  • 부상으로 말미암아 전방 십자인대가 아예 없는 선수로 알려져있다. 이 경우 사실상 선수생활이 불가능한데. 이원식 선수의 경우, 인대가 없어진 부분을 근력강화를 통해 근육으로 메워버려 선수 생활을 계속해나갈 수 있었다. 흠좀무.[2]
  • 2000년 4월23일 전북과의 익산경기에서 1-2로 뒤지던 후반직전에 2-2 동점골이 들어갔고, 문전앞에 너무 많은 선수들이 있어서 누가 득점을 했는지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연장전 시작직전에 연맹기록원은 부천 SK 주무에게 확인을 요청, 이원식의 골로 확인을 해주었고 이원식의 골로 기록이 됐다. 하지만 비디오 분석 결과, 이원식 선수는 득점과는 무관한곳에 위치해 있는게 밝혀졌고, 득점은 윤정춘선수로 밝혀졌다. 다음날 프로축구연맹은 상벌위원회를 열어 이원식 선수에게 벌금 80만원, 부천구단에게는 120만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원식 선수는 이후 비난에 마음고생이 심했고 이후 한일정기전이 열리면서 여론의 관심이 한일전에 쏠리자 한일전에 감사할 정도였다고.... 이후 유로 2000 8강전에서 유고에게 4골을 넣어 클루이베르트가 6골로 득점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나 경기직후 자신의 득점이 아닌 유고의 자책골이라 양심선언을 하면서 그게 사실로 밝혀지자 유고의 사보 밀로세비치(5골)와 함께 득점 공동선두로 내려앉으면서 다시 한번 주목을 받기도 했다. 안습... 이원식 선수는 상벌위원회에서 "축구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큰 죄를 지었다. 정말 면목이 없다. 모든 사람이 맞다고 해도 내가 아니다라고 말했어야 할 상황에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 그대로 돼 버렸다."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3]


경력[편집]


같이 보기[편집]

외부링크[편집]

  • KFA 인터뷰 나의 선수시절 - 이원식 편 : [2]


참고[편집]

  1. 남선수는 성남 일화 천마에서 활동하다 천안시청으로 내려와 내셔널리그 무대를 쓸고다녔지만, 이원식 선수는 대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정리한 지 5년여만에 그라운드로 복귀했던 것이기 때문에, 남선수만큼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리그에서만 2경기를 출장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2. 비슷한 케이스로 조광래가 있다.
  3. 당시 보도자료 : 프로축구 이원식 선수 가짜골 소동 큰 파문[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