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대한축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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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1936년 ~ )은 대한축구협회 제45대~46대 회장이자. 대우그룹을 이끈 기업인이다. 1999년 거액의 분식회계로 대우사태를 유발하였고 이후 해외도피를 하며 떠돌다 지난 2005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약력[편집]

대한축구협회 활동[편집]

재정기여[편집]

당시 재계출신을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앉힌것은 무엇보다도 재정적 지원을 기대한 측면이 컸다. 당시 김우중회장은 매년 15억원을 출연, 임기기간동안 총60억원을 출연하였다. [1] [2]

한국프로축구위원회 통합[편집]

본격적인 프로화를 통해 1987년 한국프로축구위원회(KPFO)가 출범했지만 김우중 회장의 취임 1년만이자 프로위원회 출범 2년차에 결국 대한축구협회의 산하로 다시 통합된다. 프로축구의 활성화를 위해 별도의 기구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출범된 프로위원회였으나 이 조직을 다시 흡수한 대한축구협회 산화 프로특별위원회도 프로축구의 활성화를 이뤄내지 못했다.[3]

호남연고 창단 실패[편집]

호남연고 프로팀을 임기중 추진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완산 푸마 문서 참고.

국제대회[편집]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진출에 성공하여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축구 2회연속 진출하였고,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진출에 성공하여 28년만에 올림픽 축구 자력진출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1992년 아시안컵 진출 본선에 실패하게 된다.

외국인 감독 영입[편집]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 감독으로 독일 출신의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을 영입하였다 [4]

사망[편집]

2019년 12월9일 오후11시50분경 숙환으로 사망한다. 향년 83세.

에피소드[편집]

  • 대우 로얄즈 구단주로써 프로축구 최초로 외국인 감독을 영입하였다. 1990년 대우의 시즌을 이끈 동독의 프랑크 엥겔이 그 주인공.
  • 대한축구협회장으로 추대되기 이전엔 이를 의식했는지 무려 5개[5] 의 실업팀을 운영하기도 했다. 자세한 사항은 대우 아마축구단 목록 참고
  • 1997년 대우자동차레간자가 대박을 쳤고, 부산 대우 로얄즈도 3관왕으로 최고의 성적을 내자 축구팀이 대우의 최고 히트상품인 레간자보다 더 좋은 상품이다[6]라고 말하며 축구단에 대한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최고의 히트상품들은 나중에 큰 위기를 맞게되고 1997년은 마지막 리즈시절이 되었다.
  • 부산 센텀시티 부근에 축구전용구장의 건설을 추진하였으나 대우사태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사실상 전임이라 할 수 있는 최순영 회장과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대한축구협회장을 역임한점, 프로축구 우승팀을 보유한점, 이후 자신의 기업이 정부에 의한 타살을 당했다고 주장하는점

같이 보기[편집]

참고 사항[편집]

  1. [1]
  2. 전임 회장이었던 신동아그룹의 최순영회장은 재정적 지원이 축구인들의 기대에 다소 못미친듯 하다.
  3. 이후 후임 회장인 정몽준 회장 시절인 1994년에 오늘날의 프로축구연맹이 출범한다.
  4. 하지만 본선은 김삼락 감독이 지휘한다.
  5. 대우전자,대우자동차,대우정밀.대우조선,대우중공업
  6. 베스트 일레븐 1997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