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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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최정민.jpg
제1회 아시안컵 우승 후 최정민

최정민 (1927년 7월 7일 ~ 1983년 12월 8일) 은 대한민국 국적의 전직 축구선수이자 지도자이다.

아시아의 황금다리[1]라 불리우며 1950년대 한국 축구를 호령하였던 스트라이커이다.



출생과 성장[편집]

1927년 7월 7일, 평안남도 평양시 신창리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공차기를 즐기던 최정민 씨는 평양 종로초등학교, 평양 공립중학교를 나왔으며 1950년 평양체육대학에 재학 도중 6.25 사변을 맞이하였다.[2] 이후 1951년 1.4 후퇴 당시 월남하였으며, 52년 김용식 선생 등 뜻있는 축구인들이 모여 대구방직 축구팀을 만들자 육군에 복무중이던 최정민 씨도 여기에 참가하여 남한에서도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하였다.


CIC 입단과 국가대표[편집]

1953년 특무부대김용식 코치를 축구단 사령탑에 앉혀놓음에 따라, 전쟁 통에 시련기를 겪던 한국축구도 서서히 부활의 싹을 움트고 있었다. 당시 중위 신분이었던 최정민 씨는, 민병대, 옥정빈 같은 당대 축구 플레이어들과 함께 CIC로 이적하였으며 CIC 시절부터 최정민 씨는 본격적으로 스트라이커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쓰라린 시련을 맛보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당해 대회를 통해 체격을 기르고 몸싸움을 늘려야겠다는 생각에 강력한 웨이트레이닝을 하여 몸싸움과 기술을 갖춘 골게터로 발돋움하였고, 이러한 최정민 선수의 성장은 제 1회 아시안컵 우승을 대한민국이 거머쥐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결혼과 지도자 생활[편집]

1960년 제 2회 아시안컵에서도 크게 활약하였던 최정민 선수는 1960년 미스코리아 출신인 서정례 양과 결혼식을 올렸으며,[3] 결혼 1년 후인 1961년 선수 생활을 정리하였다. 선수 은퇴 후, 중앙대학교 코치와 CIC 코치, 양지축구단 감독 및 국가대표 감독 등을 역임하였다.


사망[편집]

지도자 생활 중에도 경평축구대항전을 부활시키고[4] 조기축구대회에도 참가하는 등 축구에 대한 왕성한 애정을 쏟던 최정민 씨는 1983년 고려대학교 병원에 입원했다 지병이었던 당뇨병을 극복하지 못한채 끝끝내 동년 12월 8일 새벽 3시, 사망하였다. 향년 53세. 너무 이른 나이의 죽음이었기에 축구 관계자 모두가 안타까워 하였다.


에피소드[편집]

  • 1956년 AFC 아시안컵에서 대활약한 최정민 선수를 두고, 홍콩 1부 리그 팀이 입단 제의를 넣었고 구두계약에까지 성공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기붕 당시 대한체육회 회장의 반대로 해외 진출이 무산된바 있다고..[5] 이 때 해외 진출에 최씨가 성공했다면, 허윤정 선수보다 13년은 앞선 한국축구 1호 해외 진출 사례가 되었을 것이다.
  • 훤칠한 외모와 큰 키를 갖춘, 지금 기준으로도 눈에 띌만한 미남이었다. 당대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었음은 당연. 최정민 선수의 숙소에는 매일 팬레터와 선물이 쌓였다고 한다.
  • 흔히 한국 스트라이커 계보를 꼽을때 첫번째로 들어가는 이름이 으레 최정민 씨였다. 그만큼 195,60년대 최정민 선수가 남긴 족적이란 대단했다. 이후 최정민이 스타트를 끊은 스트라이커 계보는 이회택, 차범근, 최순호, 황선홍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이 애미나이” 혼내며 차범근 키웠다, 원조 축구 영웅 최정민


참고[편집]

  1. 이 별명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 경기를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유린하는 최정민을 보고 일본 언론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2. 당시 평양체육대학에서도 손꼽히는 스타 플레이어셨다고. 특히 장신을 이용해 축구 뿐만 아니라 배구에서도 에이스로 활약하였다. 한번은 체육 대회에 최정민 씨가 축구, 배구 대표로 모두 참가했는데 1시간 간격으로 축구와 배구 결승전이 있었던 탓에 배구경기가 끝나자마자 축구 경기를 하러 달려가셨다고. 다행히(?) 최정민 없이는 우승이 불가능할거라 생각했던 선수들이 경기를 지연시킨 탓에 최정민 씨는 축구 결승전도 뛸 수 있었다. 결과는 축구와 배구 모두 평양체육대학의 우승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이 힘에 부쳤던 최정민 씨는 결국 축구에만 전념하기로 마음먹으셨다고..
  3. 미스코리아와 축구선수의 결혼식 사례는 이게 최초. 이후 수많은 축구선수들이 미스코리아 출신과 결혼식을 올리게된다.
  4. 진짜 경평전은 아니고, 남한에 거주하고 있었던 경성 출신 OB와 평양, 함흥 출신 OB간 친선대회였다.
  5. 출처 : 월간축구 1972년 5월호, '한국이 낳은 백만불의 다리 최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