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배(朴正倍, Park, Juung Bae, 1967년 2월 19일~)는 대한민국 국적의 축구선수이자 축구인으로 1990년부터 1999년까지 K리그에서 활동하였던 수비수이다.
프로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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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소년 생활편집
K리그편집
국가대표 생활편집
1991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 국가대표에 발탁된 이후로 안정적인 출장을 이어갔으며, 19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도 주전 수비수로 활약하며 당시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김호에게 중용되었다. 맨마킹 능력과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공격 가담 능력이 높게 평가 받았다는 후문.. 그 기대에 보답하듯, 1993년 10월 당시 카타르 도하에서 열렸던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에도 참가해 1차전에서 이란을 상대로 선제골을 터뜨렸던바 있다. 아시아 최종예선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도하의 기적으로 이어졌고, 박정배 선수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본선 월드컵 무대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후 박선수는 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 조별예선 3경기를 모두 소화하였으며, 상대팀 주 공격수를 맨마킹하는 역할을 맡았다. 즉 조별예선 1차전 스페인과의 경기에서는 훌리오 살리나스를 전담 마킹하였고, 3차전 독일과의 경기에서는 위르겐 클린스만을 맡았던셈. 하지만.. 마크 능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잘 막아내다가도 순간적인 상대 플레이에 당해 살리나스(1골)와 클린스만(2골)에게 각각 실점을 헌납했다. 물론 이는 박정배 개인의 잘못이기 이전에 한국 수비 조직력 자체의 문제와 전반 끝나기 10분전과 후반 10분여부터 체력이 방전되는 한국 특유의 플레이 기복의 문제에 가까웠고, 상대가 워낙 월드 클래스에 전성기 기량이었던 점도 한몫했다는 평.
이렇게 잇달아 실점을 허용하며 세계의 벽을 실감한 수비수 정도로 세간의 기억에 머물뻔했던 박정배 선수는, 3차전인 독일전에서 감각적인 어시스트를 올리며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이미 전반에만 독일에게 3골을 실점한 한국은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파상 공세를 펼쳤고, 후반 6분 박선수가 하프라인을 넘어서까지 전진 오버래핑을 펼치며 쇄도해 들어갔다. 이어 박선수는 로빙 패스를 황선홍에게 찔러넣었고, 이 패스 하나로 독일 수비진이 완전히 뚫려버린다. 황선수는 박선수가 만들어준 골키퍼와의 1:1 찬스에서 감각적인 칩슛을 쏘며 만회골을 성공시켰다.[1] 한국의 월드컵 경기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어시스트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 생각보다 세간에 회자되지 않는 명장면 중 하나. 아무래도 1:3으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얼른 한골 더넣어야 희망이 보이는데 하고 똥줄이 타던 시점이라 아름다움을 느낄 여유가 없었던듯 싶다. 지금같이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 이 장면이 나왔더라면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을텐데 아쉬울 다름.. 하지만 박정배 선수를 비롯한 한국 선수들의 분전에도 결과는 2:3 한국의 패배로 끝났고, 박선수와 한국의 월드컵 도전도 막을 내렸다. 이후 박선수는 1996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하였으나 최영일, 김태영 등 전문 맨마킹 요원들이 잇달아 등장하면서 대표팀에서 퇴장하게 된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악착같은 맨마킹과 헤딩 볼경합 능력으로 각광을 받았던 선수였다. 뿐만 아니라 발도 상당히 빠르고 공격 센스도 있었던 다재다능한 선수. 그러나 리그에서나 국가대표에서나 주로 중앙 수비를 맡았기 때문에 다른 능력은 크게 조명받지 못했다.
에피소드편집
- 국가대표에서의 활약도에 비해, K리그에서는 지지리도 상복이 없었던 편이다. 특히 10년간 K리그에서 활약하면서 우승은 딱 한차례 해봤는데 1990년 박선수의 데뷔시즌이 럭키금성의 리그 우승이 그것. 1994년 대우 로얄즈로 이적해서도 로얄즈의 암흑기만 함께 했을뿐 영광의 시절은 함께하지 못했다. 대우가 비상하기 직전에 울산 현대로 이적해버려 우승컵 3개를 들어올릴 기회를 놓쳤던 것.;; (부산 대우 로얄즈는 박선수가 울산으로 이적한 이듬해 1997년 3관왕 자리에 오른다.)
경력편집
- 1997 ~ 1999 : 울산 현대 호랑이 / K리그
같이 보기편집
- 박성배 (이름이 비슷한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