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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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수덕.jpg
청룡 대표팀 시절 박수덕
ⓒ월간축구

박수덕 (1948년 7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 선수이자 축구인이다.




프로필[편집]

  • 이름 : 박수덕
  • 출생일 : 1948년 7월 3일
  • 신체 : 175cm / 74kg (선수 시절)
  • 국가대표 경력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1972년 뮌헨 올림픽 아시아예선 대표
1972년 AFC 아시안컵 본선 대표
1970년 ~ 1972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통산 A매치 34경기 출장 18골)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학창 시절[편집]

대전 출신으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대전상고 1학년 시절부터 축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후 대전상고 3학년 시절 청소년대표팀 상비군에 이름을 올리면서 경희대학교의 스카우트를 받는데 성공하였고, 대학교에 진학한 뒤로는 물오른 득점 감각을 선보이며 소속팀을 1969년 춘계대학축구연맹전 우승으로 이끌고 국가대표 상비군에도 뽑히는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성인 시절[편집]

경희대학교를 졸업한 뒤, 기업은행 축구단에 입단한 박선수는 소속팀보다 청룡 대표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다 청룡 해단 이후에는 해병대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마쳤다. 이후 기업은행에서 활동하다, 변호영 씨의 권유로 강기욱 등과 함께 홍콩 세이코 SA에 입단해[1] 75/76시즌 활동한 뒤 선수 생활을 정리하였다.


국가대표 시절[편집]

1969년 국가대표 상비군에 이름은 올렸지만 A매치 데뷔에는 실패했던 박선수는, 이듬해인 1970년 킹스컵에 참가하는 청룡 대표팀의 일원이 되어 라오스를 상대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2골을 기록하며 무서운 신예로 주목을 받더니, 이어 벌어진 싱가포르와의 경기에서도 2골, 킹스컵 결승전 對 태국 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는 충격적인 데뷔 무대를 치르는데 성공한다. 즉 국가대표팀 막내가 대회 득점왕을 거머쥔데 이어, 대회 우승을 확정짓는 결승골까지 터뜨려버렸던 것.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국가대표 붙박이가 된 박선수는 청룡 대표팀의 일원으로 1972년까지 활약하였다.


은퇴 이후[편집]

홍콩 세이코 SA에서 1시즌간 활약한 뒤 비교적 이른 나이인 29세에 은퇴를 선언한 박수덕 씨는, 1976년 6월부터 대구 협성상고 축구부 코치를 맡으며 지도자의 길을 밟아갔다.[2] 이후 1983년을 앞두고 청구고등학교 축구부 코치로 부임하였으며 여기서 이수철, 박창현 등을 길러내며 84년 대통령금배 전국고교축구대회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기록을 세운다. 이어 1987년에는 영남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부임하여 백승철, 신태용[3]을 길러내는 등 착실히 경력을 쌓아갔고, 프로축구팀 감독 하마평에도 오르내리며 학원축구계의 능력있는 지도자로 인정받는듯 했는데.. 1995년 고교 축구부 감독으로부터 금품을 받고 선수를 부정 스카우트 했다는 혐의로 구속되면서 흑역사를 쓰고 만다.[4] 이후로 후속 기사가 없고 박씨도 영남대 축구부 감독 생활을 계속해나간 것으로 봐서는 해당 혐의는 유야무야 넘어간듯 하지만, 박씨의 프로축구단 감독 하마평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결국 2005년까지 영남대 축구부 감독으로 조용히 생활하다 정년 퇴직하셨다고 한다.


에피소드[편집]

  • 경희대학교 4학년 시절에는 경희대 축구부 코치가 공석인 날이 잦아, 박수덕 선수가 직접 전술과 엔트리를 짜고 선수단을 독려하여 대회를 치렀다고 한다. 한마디로 플레잉코치였던 셈. 이 때의 경험을 발판삼아 비교적 이른 나이에 바로 지도자로 안착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 한일전에 강했고[5], 1경기 다득점에도 능한 선수였다. 1972년 뮌헨 올림픽 아시아예선전에서는 이회택, 정규풍 등 유수의 선수를 제치고 득점 1위를 랭크하기도 했을 정도. 다만 제일 중요한 경기였던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는 무득점으로 침묵해 한국의 올림픽 본선 진출에 공헌하지 못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1. 참고로 김재한 선수의 경우는 이들보다 6개월여 뒤인 1976년 2월에 세이코 SA에 입단하였다.
  2. 협성상고 코치를 맡으면서 부업으로 심판 역할도 수행하셨던듯 하다. 관련 기사 :[1]
  3. 단, 신태용은 대구공고 시절부터 초고교급으로 평가받으며 다른 유수의 대학 축구부도 모두 탐내는 자원이었다. 영남대가 신태용을 둘러싼 스카우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신태용과 친했던 대구공고 동기생 2명을 영남대에 입학시켜 주겠다는 조건 덕분이었다고.. 물론 고교 스타가 대학권에 들어와서 완전히 묻히는 일도 흔히 벌어졌던걸 생각해보면 박수덕 감독이 신태용을 길러냈다고 표현해도 크게 문제는 없을듯 하다.
  4. 관련 기사 : [2]
  5. 한일전에만 3경기를 출장해 통산 3골을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