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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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을 넣고 환호하는 오석재 선수(최좌측)

오석재(吳錫載,1958년 10월 13일~)는 대한민국 출신의 전직 축구선수이자 종교인으로 1983년부터 1985년까지 프로에서 활동하였다.

1989년에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 현재는 해외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프로필[편집]

선수 프로필[편집]

  • 이름 : 오석재
  • 출생일 : 1958년 10월 13일
  • 신체 : 185cm[1] / 83kg
  • 수상 경력
제32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득점상, MVP 석권
제36회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득점상, MVP 석권
87 전국춘계실업축구대회 득점상
  • 국가대표 경력
1976년 AFC U-19 챔피언십 본선 대표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아시아예선 대표
1982년 FIFA 월드컵 아시아예선 대표
1984년 AFC 아시안컵 아시아예선 대표
(통산 A매치 15경기 출장 9골)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 프로 기록
소속팀 연도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할렐루야 축구단 할렐루야 축구단 1983 16 2 6 2 0 0
1984 22 5 9 3 0 0
할렐루야 축구단 할렐루야 축구단 1985 17 4 3 1 3 0
통산(K리그) - 55 11 18 6 3 0
K리그 통산 기록은 리그컵 기록 포함. 2014년 8월 1일 기준.

선수 시절[편집]

유소년 시절[편집]

부산 출신으로 수영중학교, 동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 경신고등학교로 스카우트 되어 활동한 뒤[2] 건국대학교에 진학, 졸업한 선수이다. 동아고 시절부터 신장이 185cm에 육박하는 초장신 스트라이커로 주목을 받았으며, 경신고로 전학간 뒤 곧바로 청소년대표팀에 이름을 올리며 아시아무대에서 활약하였다. 1976년에는 AFC U-19 챔피언십에 참가하여 청소년대표팀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약하였지만, 4강전에서 북한 U-19를 상대로 분패하였던바 있다.[3] 건국대학교에 진학해서는 1977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5골을 쏟아넣으며 대회 MVP와 득점왕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국가대표 시절[편집]

1977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보여준 놀라운 활약을 토대로, 성인 국가대표에 발탁되었고[4] 킹스컵에서 2도움을 올리는 등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후 1978년 프로 경력이 있어 아시안게임에 출전하지 못하게 된 김재한 선수를 대신하여,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을 준비하고 있던 화랑 대표팀에 합류하는데 성공하였고,[5] 이후 방콕 아시안게임 본선 무대에서만 6골을 쏟아넣으며, 한국의 금메달 획득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건국대학교 재학 시절 이루어낸 성과였다.

하지만 이 대회 직후부터 고질적인 무릎 통증과 허리 디스크가 겹치면서, 선수 생활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는데.. 다행히 이를 극복하며[6] 차츰 기량을 회복해 나갔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대표팀 등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는 모습을 이어갔다. 하지만 부상으로 1984년 AFC 아시안컵 본선 엔트리에 들지 못한 이후에는 국가대표에 선발되지 못하였다.


K리그 시절[편집]

건국대 졸업 후, 제일은행충의를 거친뒤 1982년에 할렐루야 축구단에 입단했으며,[7] 1983년 수퍼리그에서 팀내 최다득점(6골)을 기록하며 팀을 초대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이후 대기업 프로팀이 연이어 창단되어 리그내에서 할렐루야의 입지는 좁아졌지만 팀내에서의 활약은 꾸준했다. 1985년을 마지막으로 할렐루야 축구단은 아마추어로 전환했고 오석재 선수도 할렐루야 축구단과 함께 아마추어 무대에서 활동하였다.


에피소드[편집]

  • 유년 시절,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한다. 중학교도 겨우 마쳤을 정도라고. 다행히 박경화 당시 동아고등학교 코치의 후원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고, 고등학교에서 축구도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오석재 선수에게 박경화는 평생의 은인이 되었으며, 박경화 씨의 권유에 유수의 대학 축구부 제의를 다 마다하고 건국대 축구부에 진학하기도 하였다.
  • 1970년대 말과 80년대 중반까지는 국가대표 및 프로 무대에서 빼어난 활약을 보여주며 대중들에게 유명한 선수였지만, 선수 말년을 장기간 실업에서 보내고 이후 지도자 생활보다는 해외 선교 활동에 매진했기 때문에 요즘엔 모르는 사람이 많다.[8]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1. 등록은 185cm로 되어있지만 본인은 188cm이라고....
  2. 정확히는 동아고등학교 축구부 코치였던 박경화 씨가 경신고등학교 코치로 전임하자 지도자를 따라 오석재 선수도 상경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다만 진학 문제 해결이 잘되지 않아, 1년을 유급하였다.
  3. 여담으로 이 경기가 사상 첫번째 남북전 경기였다.
  4. 이 때는 국가대표 B팀인 충무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박스컵에 참가하였다.
  5. 당시까지만 해도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등에 프로 선수들의 참가가 불허되던 시기였다.
  6. 이 때 교회를 처음 나갔다고 한다. 건국대 교수가 안수기도를 추천했다고..;;
  7. 1979년 자선경기대회와 1980년 프랑크 푸르트와의 경기에서 할렐루야 축구단 소속으로 경기를 뛰었지만 1980년 12월에 할렐루야 축구단이 정식으로 창단한 뒤에 대학을 졸업하고 제일은행에 입단했다.
  8. 포털사이트에서 인물검색을 해도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