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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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운수와조광래.JPG
좌측 장운수 감독 우측은 조광래씨의 선수시절 모습이다.

장운수(張雲洙, 1936년 11월 19일~ 1992년 12월 29일)는 수많은 축구스타들을 육성했던 한국축구계의 전설적인 지도자로, 대우 로얄즈의 초대 감독이기도 하다.[1] 1992년 작고하였다.



프로필[편집]

  • 이름 : 장운수 (張雲洙)
  • 생년월일 : 1936년 11월 19일
  • 사망월일 : 1992년 12월 28일
  • 출생지 : 평안북도 정주시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지도자 프로필[편집]

  • 지도자 경력
연도 경력
1958 ~ 1973 경신중학교 → 경신고등학교 코치[2]
1964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1968 감독
1974 ~ 1975 계성고등학교
1976 ~ 1977 안양공업고등학교
1978 국가대표 B팀[3]
1978 ~ 1980 연세대학교
1981 ~ 1983 대우 로얄즈 대우 로얄즈
1984 총감독[4]
1985 ~ 1986 감독
1987 단장
  • K리그 감독 기록
소속팀 리그 연도 승리 무승부 패배 K리그 순위
대우 로얄즈 대우 로얄즈 수퍼리그 1983 6 7 3 준우승
1985 9 7 5 3위
1986 17 4 15 3위
통산[5] K리그 - 32 18 23 준우승 1회
통산 승/무/패 기록은 리그컵 기록 포함. 2012년 6월 22일 기준.


설명[편집]

이북 출신으로 수많은 축구스타들을 육성했던 한국축구계의 전설적인 감독이다. 그가 길러낸 선수들 중 유명한 선수만 꼽아봐도 차범근, 김진국, 김강남, 김성남, 이태호, 장외룡, 이장수, 이춘석, 정해원, 조광래, 유태목, 정용환, 김풍주 등이 있으며, 현재 축구계 임원으로 활약중인 안종복, 오세권 등도 장운수 감독의 제자였다. 대우 로얄즈의 초대 감독이기도 하며, 84시즌 대우를 K리그 우승으로 이끌어 지도자 상을 수상한 바있다.


지도자 생활 이전까지[편집]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재령 명신중학을 나오셨다고 한다.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이후 경희대학교 축구부로 진학하였다가 경희대 졸업 후 곧바로 경신중학교 축구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셨다고 한다.[6]


경신중, 경신고 코치 시절 (차범근, 김진국 발굴)[편집]

장운수 감독은 경신중 코치 시절 차범근을 발굴해 축구 선수가 될수 있도록 인도한 은인으로 유명한데, 본래 중학교 때까지 하키 선수였던 차범근을, 당대 축구 명문이었던 경신중학교로 전학시켜 축구부에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비슷한 시기 수원북중에 다니며 축구와 연을 맺지못하고 있던 김진국도 장운수 코치의 눈에 우연히 들면서 축구의 길을 걷게된다. 특히 차범근이 경신고등학교 재학 시절, 차범근을 축구계에 처음으로 소개해 (월간축구 71년 1월호, 이달의 유망 선수), 청소년대표 발탁으로 이끈 장본인도 역시 장운수 감독이다. (때문에 훗날 차범근도 자신이 가장 고마움을 느끼는 스승 2명에 고 장운수 감독과 고 리누스 미첼 감독을 꼽았다.)[7]


안양공고 시절 (정해원, 이춘석 육성)[편집]

80년대 초중반, 한국 스트라이커의 차세대 기대주이자, 플레이메이커 자질까지 갖추고 있었던 정해원을 안양공고 시절부터 대우 로얄즈에 이르기까지 지도했던 이도 장운수 감독이었다. 70년대 당시 안양공고는, 오갈데 없는 고아들을 축구부에서 합숙시키며 축구를 시키기로 유명했는데, 보통의 고등학생보다 3~4살 위였던 안양공고 선수들 틈바귀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정해원과 이춘석을 장운수 감독은, 자신이 안양공고 감독에서 연세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이들을 연세대로 진학시켜, 한국 국가대표 공격진에 차세대 에이스로 육성하게 된다. 연세대 시절 정해원은 50M 단독 드리블에 이은 골로 세간의 주목을 받아, 이후 국가대표 붙박이 공격수가 되었으며, 이춘석 선수는 대우로얄즈에서 타겟 스트라이커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며 박양하선수의 파트너가 되어 활약했다.


연세대 시절 (이장수, 장외룡 육성)[편집]

장운수 감독이 연세대를 맡았던 당시, 연세대에는 GK 정성교, DF 이장수, 장외룡, MF 유태목, 왕선재, FW 정해원, 이춘석등의 충실한 멤버 구성을 자랑했다. 하이라이트는 80년 3월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결승전이었는데, 연세대는 각급 실업팀을 모두 누르고 결승전에 진출, 당시 아마축구 최강자의 위치에 있었던 육군 충의(상무의 전신) 팀과 맞붙게 되었을 때의 일인데, 당시 육군에는 조광래, 최종덕, 박성화등 국가대표 선수들이 즐비했고, 도저히 연세대는 상대가 안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반 초반 위에 언급했던 정해원의 50M 단독 드리블에 의한 거짓말 같은 골로 리드를 잡은 연세대는 후반 20분 유태목의 쐐기골로 2:0 승. 동 대회 우승을 차지한다. 이때의 활약으로 정해원 장외룡 왕선재 유태목 등은 모두 국가대표로 차출되었고, 여기서 축구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장운수 감독을 대우 로얄즈는 차기 감독으로 내정하게 된다.


대우 로얄즈 시절[편집]

1981년 1월, 대우 로얄즈는 이종환 전감독을 대신하여 장운수 감독의 선임을 발표하였다. 월봉 120만원 가량으로 당대 최고 대우였다는 후문. 대우 부임 후, 춘계실업축구연맹전에서 우승을 거둔 장감독은 1981년부터 수퍼리그 1983까지 대우의 감독으로 활약하며, 조광래, 정해원, 장외룡, 강신우 등을 국가대표로 육성하였다. 하지만 1983년 초대 수퍼리그 우승을 노렸던 대우 로얄즈가 할렐루야에 밀려 준우승에 그치자, 대우 프론트 측은 장감독을 강하게 압박했고 결국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장감독은 1984년 조윤옥 감독에게 바통을 넘기고 대우 로얄즈 감독에서 단장으로 물러나고 만다.

그러나 조윤옥 감독은 1984년 초반 4위에 그치는 부진한 경기 운영능력을 보였고, 또다시 참을성 부족이 발동한 대우 프론트는 1984년 6월 일선에서 물러나있던 장운수 감독에게 대우 감독 지휘권을 넘겨 잔여시즌을 지휘케하였다. 결국 장운수 감독은 1984년 후기리그 우승 후, 유공 코끼리와의 챔피언결정전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1984년 K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대우 로얄즈의 첫번째 리그 우승은 이토록 우여곡절 끝에 얻어진 것이었다.[8] 1984년 K리그 우승 후, 1985/1986 아시아클럽챔피언십 우승, 동시즌 아프로아시안컵 우승 등을 이끌며 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강의 팀으로 대우를 키워낸 장운수 감독이었으나, 1985년 수퍼리그 3위, 1986년 수퍼리그 4위에 머물며 리그에서는 두드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결국 1987년 시즌을 앞두고 이차만 당시 수비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물러나게 된다.

사망[편집]

대우 로얄즈 감독직 사임 후, 대우 아마추어팀 감독 및 대우 로얄즈 단장을 역임하던 장운수 씨는 1988년 겨울 뇌졸증으로 쓰러지셨으며, 투병 생활 끝에 1992년 12월 28일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타계하셨다. 향년 64세.


에피소드[편집]

  • 대우 감독직을 맡으면서 성적 압박 등으로 몸무게가 6개월만에 8kg이나 빠지실 정도로 맘고생을 심하게 하셨고, 이것이 건강을 해치신 주요인이었다는 증언이 많다. 당시 대우는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강팀이었으나 프로 축구팀을 국가대표 상비군 수준으로 생각하던 대한축구협회의 정책 탓에, 프로 축구 팀의 시즌 일정에 관계없이 대우의 핵심 선수 4~5명을 빼앗겨 짧게는 1~2개월 길게는 5~6개월(!!)씩 출전을 못시키는 경우가 허다했다. 결국 대우는 유명한 선수가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프로에서 성적을 내지못하는 아이러니를 장기간 겪어야만 했다.
  • 김진국, 차범근, 정해원 등 고교 시절부터 장운수 감독의 지도를 받아온 선수들 중 상당수가 장운수 감독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오로지 축구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장운수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던적 있는 안양공고 축구부는 당시 상당수 축구부 선수들이 고아였기 때문에 장운수 감독이 감독 겸 아버지로서의 역할까지 자임하셨다고 한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사항[편집]

  1. 단, 새한자동차 축구단 시절까지 합산하면 대우의 초대 감독은 前 유공 코끼리 감독인 이종환 씨였다. 훗날 새한자동차 축구단이 대우 축구단으로 재편되면서 장운수 감독이 취임.
  2. 당시만 해도 코치 = 감독의 개념이었음에 유의.
  3. 킹스컵 참가를 위해 구성된 국가대표 2진이었다.
  4. 84시즌 도중 조윤옥 감독이 경질되자 총감독이란 직함을 유지한채 조감독을 대신해 대우 로얄즈의 잔여경기를 지휘하였고 1984년 수퍼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5. 1984년 시즌은 기록상으로는 조윤옥 감독으로 되어있으나, 시즌 중반 조윤옥 감독이 사실상 경질되고 장운수 감독 대행체제를 구성
  6. 1950년대 당시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축구 선수 생활을 계속 하려면 군인이 되는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7. 훗날, 차범근이 독일에서 성공 가도를 달릴 무렵, 장운수 감독이 제자를 찾아 독일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차범근과 만난 시간이 저녁 8시였다고 한다. 오랜만에 은인을 만난 차범근은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으나, 제대로 얘기를 해볼 새도 없이 9시가 되자마자 "선생님, 내일 훈련 스케줄이 있어 먼저 자야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침실로 들어가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차범근의 철저한 자기관리를 꼽을때 으레 드는 에피소드 중 하나.
  8. 단, K리그 연맹 기록과 대우 로얄즈 후신인 부산 아이파크 역사 항목에는 1984년 K리그 우승이 조윤옥 감독의 공적인 것으로 잘못 기재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