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운수
장운수(張雲洙, 1936년 11월 19일~ 1992년 12월 29일)는 수많은 축구스타들을 육성했던 한국축구계의 전설적인 지도자로, 대우 로얄즈의 초대 감독이기도 하다.[1] 1992년 작고하였다.
프로필[편집]
지도자 프로필[편집]
설명[편집]이북 출신으로 수많은 축구스타들을 육성했던 한국축구계의 전설적인 감독이다. 그가 길러낸 선수들 중 유명한 선수만 꼽아봐도 차범근, 김진국, 김강남, 김성남, 이태호, 장외룡, 이장수, 이춘석, 정해원, 조광래, 유태목, 정용환, 김풍주 등이 있으며, 현재 축구계 임원으로 활약중인 안종복, 오세권 등도 장운수 감독의 제자였다. 대우 로얄즈의 초대 감독이기도 하며, 84시즌 대우를 K리그 우승으로 이끌어 지도자 상을 수상한 바있다.
지도자 생활 이전까지[편집]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재령 명신중학을 나오셨다고 한다.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이후 경희대학교 축구부로 진학하였다가 경희대 졸업 후 곧바로 경신중학교 축구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셨다고 한다.[6]
경신중, 경신고 코치 시절 (차범근, 김진국 발굴)[편집]장운수 감독은 경신중 코치 시절 차범근을 발굴해 축구 선수가 될수 있도록 인도한 은인으로 유명한데, 본래 중학교 때까지 하키 선수였던 차범근을, 당대 축구 명문이었던 경신중학교로 전학시켜 축구부에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비슷한 시기 수원북중에 다니며 축구와 연을 맺지못하고 있던 김진국도 장운수 코치의 눈에 우연히 들면서 축구의 길을 걷게된다. 특히 차범근이 경신고등학교 재학 시절, 차범근을 축구계에 처음으로 소개해 (월간축구 71년 1월호, 이달의 유망 선수), 청소년대표 발탁으로 이끈 장본인도 역시 장운수 감독이다. (때문에 훗날 차범근도 자신이 가장 고마움을 느끼는 스승 2명에 고 장운수 감독과 고 리누스 미첼 감독을 꼽았다.)[7]
안양공고 시절 (정해원, 이춘석 육성)[편집]80년대 초중반, 한국 스트라이커의 차세대 기대주이자, 플레이메이커 자질까지 갖추고 있었던 정해원을 안양공고 시절부터 대우 로얄즈에 이르기까지 지도했던 이도 장운수 감독이었다. 70년대 당시 안양공고는, 오갈데 없는 고아들을 축구부에서 합숙시키며 축구를 시키기로 유명했는데, 보통의 고등학생보다 3~4살 위였던 안양공고 선수들 틈바귀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정해원과 이춘석을 장운수 감독은, 자신이 안양공고 감독에서 연세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이들을 연세대로 진학시켜, 한국 국가대표 공격진에 차세대 에이스로 육성하게 된다. 연세대 시절 정해원은 50M 단독 드리블에 이은 골로 세간의 주목을 받아, 이후 국가대표 붙박이 공격수가 되었으며, 이춘석 선수는 대우로얄즈에서 타겟 스트라이커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며 박양하선수의 파트너가 되어 활약했다.
연세대 시절 (이장수, 장외룡 육성)[편집]장운수 감독이 연세대를 맡았던 당시, 연세대에는 GK 정성교, DF 이장수, 장외룡, MF 유태목, 왕선재, FW 정해원, 이춘석등의 충실한 멤버 구성을 자랑했다. 하이라이트는 80년 3월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결승전이었는데, 연세대는 각급 실업팀을 모두 누르고 결승전에 진출, 당시 아마축구 최강자의 위치에 있었던 육군 충의(상무의 전신) 팀과 맞붙게 되었을 때의 일인데, 당시 육군에는 조광래, 최종덕, 박성화등 국가대표 선수들이 즐비했고, 도저히 연세대는 상대가 안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반 초반 위에 언급했던 정해원의 50M 단독 드리블에 의한 거짓말 같은 골로 리드를 잡은 연세대는 후반 20분 유태목의 쐐기골로 2:0 승. 동 대회 우승을 차지한다. 이때의 활약으로 정해원 장외룡 왕선재 유태목 등은 모두 국가대표로 차출되었고, 여기서 축구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장운수 감독을 대우 로얄즈는 차기 감독으로 내정하게 된다.
대우 로얄즈 시절[편집]1981년 1월, 대우 로얄즈는 이종환 전감독을 대신하여 장운수 감독의 선임을 발표하였다. 월봉 120만원 가량으로 당대 최고 대우였다는 후문. 대우 부임 후, 춘계실업축구연맹전에서 우승을 거둔 장감독은 1981년부터 수퍼리그 1983까지 대우의 감독으로 활약하며, 조광래, 정해원, 장외룡, 강신우 등을 국가대표로 육성하였다. 하지만 1983년 초대 수퍼리그 우승을 노렸던 대우 로얄즈가 할렐루야에 밀려 준우승에 그치자, 대우 프론트 측은 장감독을 강하게 압박했고 결국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장감독은 1984년 조윤옥 감독에게 바통을 넘기고 대우 로얄즈 감독에서 단장으로 물러나고 만다. 그러나 조윤옥 감독은 1984년 초반 4위에 그치는 부진한 경기 운영능력을 보였고, 또다시 참을성 부족이 발동한 대우 프론트는 1984년 6월 일선에서 물러나있던 장운수 감독에게 대우 감독 지휘권을 넘겨 잔여시즌을 지휘케하였다. 결국 장운수 감독은 1984년 후기리그 우승 후, 유공 코끼리와의 챔피언결정전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1984년 K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대우 로얄즈의 첫번째 리그 우승은 이토록 우여곡절 끝에 얻어진 것이었다.[8] 1984년 K리그 우승 후, 1985/1986 아시아클럽챔피언십 우승, 동시즌 아프로아시안컵 우승 등을 이끌며 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강의 팀으로 대우를 키워낸 장운수 감독이었으나, 1985년 수퍼리그 3위, 1986년 수퍼리그 4위에 머물며 리그에서는 두드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결국 1987년 시즌을 앞두고 이차만 당시 수비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물러나게 된다. 사망[편집]대우 로얄즈 감독직 사임 후, 대우 아마추어팀 감독 및 대우 로얄즈 단장을 역임하던 장운수 씨는 1988년 겨울 뇌졸증으로 쓰러지셨으며, 투병 생활 끝에 1992년 12월 28일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타계하셨다. 향년 64세.
에피소드[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사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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