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아시안컵 도전사
대한민국 아시안컵 도전사는 역대 AFC 아시안컵에 참가하였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기록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AFC 아시안컵 1956
한국 대표팀 명단
포지션 | 이름 | 당시 소속팀 | 현 소속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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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탭진 | |||
감독 | 이유형 | KFA | 작고 |
코치 | 김성간 | ||
선수단 | |||
GK | 함흥철 | 헌병감실 | 작고 |
박상훈 | 해병대 | ||
FB | 박재승 | 특무대 | 생존[1] |
차태성 | 작고 | ||
석진두 | 병참단 | ||
김지섭 | 첩보대 | ||
HB | 손명섭 | 특무대 | |
김지성 | |||
박경호 | |||
김진우 | 병참단 | ||
김홍복 | 국민대 | ||
FW | 우상권 | 헌병감실 | |
김동근 | 해병대 | ||
최광석 | 고려대 | ||
김영진 | 병참단 | ||
성낙운 | |||
이수남 | 특무대 | ||
최정민 |
경기 진행
한국 대표팀은 동부 최종예선을 대만에서 1956년 9월 2일에 마치고,[2] 바로 당일 홍콩으로 배편을 통해 출발, 9월 5일에야 홍콩에 입국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홍콩과의 본선 1차전 경기가 바로 다음날인 6일에 있었던 것. 사전 준비나 적응도 없이 곧바로 진행된 경기에서 한국 대표팀은 전반 2골을 실점하며 0:2로 끌려가다가, 후반 김지성ㆍ최광석의 연속골로 간신히 2:2 무승부를 기록하며 1차전을 마쳤다. 이후 곧바로 2일 뒤 열린 이스라엘과의 2차전에서는 한국 대표팀은 체력을 회복하여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력을 펼쳐보인 끝에 우상권ㆍ성낙운의 골로 2:1 승리를 거두게 된다.[3] 마지막 3차전에서는 월남을 상대로 우상권(2골)ㆍ최정민(2골)ㆍ성낙운의 소나기 골이 터지며 5:3 승리를 거두어 결국 2승 1무의 성적으로 대회 초대 우승컵을 드는데 성공하였다.
AFC 아시안컵 1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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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
AFC 아시안컵 1960
경기 진행
1960년 10월 14일, 효창운동장에서 대한민국 vs 월남의 경기를 시작으로 리그전이 진행되었다. 당시 한국은 월남, 중화민국 등에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내비쳤지만, 이스라엘은 다소 낯선 상대로 간주하고[4] 이들과 우승을 다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월남을 상대로는, 최정민, 우상권, 문정식, 조윤옥(2골) 선수들의 골세례로 5:1의 손쉬운 승리를 거둔 뒤, 이어지는 이스라엘과의 경기를 사실상의 결승전으로 상정하고 준비하였는데.. 문제는 이러한 생각을 당시 첫번째 국제대회 개최로 관심이 고조되었던 서울 시민들도 마찬가지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에 10월 17일, 대한민국 vs 이스라엘의 경기에는 3만 가까운 관중이 몰려왔다.[5] 이에 스탠드는 물론 경기장 내 육상 트랙까지 관중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심지어 몰려드는 인파를 못이겨 정문이 부서지고 스코어 보드 쪽 담장이 붕괴해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하는 등 경기장 분위기가 지나치게 과열되어 있었다. 간신히 관중들을 라인 밖으로 밀어내고 경기를 개시하긴 했는데, 이스라엘 선수들은 이러한 홈 어드벤테이지에 기가 질려 경기를 제대로 진행하질 못했고, 결국 조윤옥(2골), 우상권로 이스라엘 마저 3:0으로 제압하는데 성공하였다.[6]
이후 3차전 중화민국과의 경기는 아시안컵 바로 직전에 있었던, 1960년 로마 올림픽 아시아예선 몰수패의 설욕전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7] 한국 선수들이 집중력을 가지고 쉼없이 공격을 퍼부었고, 결국 전반 종료를 앞두고 터진 문정식 선수의 결승골에 힘입어 1:0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해당 경기를 끝으로, 한국은 3전 전승으로 동대회를 우승으로 마무리 지었다.
AFC 아시안컵 1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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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
AFC 아시안컵 1992
대표팀 선발
1992년 일본에서 열리는 아시안컵 예선을 앞두고, 당시 대한축구협회는 예선 기간이 92 한국프로축구대회와 겹치며 이는 프로축구의 활성화에 방해된다는 명분을 내세워 실업 및 대학축구 선수로 구성된 아마 선발팀을 아시안컵 예선에 파견하였다. 이와 같은 대한축구협회의 모험에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대한축구협회는 아마 선발의 파견을 강행하였고, 당시 아시안컵 예선에 파견된 멤버들은 다음과 같다.
한국 대표팀 명단
포지션 | 이름 | 당시 소속팀 | |
---|---|---|---|
스탭진 | |||
감독 | 최길수 | 기업은행 | |
코치 | 김성남 | 고려대학교 | |
선수단 | |||
GK | 이승태 | 연세대학교 | |
김승안 | 한양대학교 | ||
DF | 손기영 | 주택은행 | |
박철 | 대구대학교 | ||
박양석 | 숭실대학교 | ||
양승구 | 동국대학교 | ||
오세응 | 기업은행 | ||
송명원 | 국민은행 | ||
최동호 | 상무 | ||
MF | 박남열 | 대구대학교 | |
김동해 | 상무 | ||
한창호 | 기업은행 | ||
이현철 | 국민은행 | ||
FW | 최범락 | 홍익대학교 | |
우홍균 | 할렐루야 | ||
노상래 | 숭실대학교 | ||
차승룡 | 인천대학교 | ||
이종훈 | 중앙대학교 | ||
유웅렬 | 할렐루야 | ||
서동원 | 고려대학교 |
예선 진행
1992년 6월 19일 방콕에서 열린 방글라데시와의 경기에서 6-0으로 크게 승리했지만, 21일 태국전에서 1-2로 패하며 본선 전망이 어둡게 된다. 결국 23일 벌어지는 태국과 방글라데시전에서 방글라데시가 이기길 바라야했는데... 태국이 1-0으로 방글라데시를 이기면서 대한민국은 36년 만에 아시안컵 예선 탈락이라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같이 보기
참고
- ↑ 2009년 김현회 기자의 기사 이후로 생존여부가 분명치않음 자세한건 추가바람. [1]
- ↑ 즉 본선 대회 일정이 시작된 뒤에, 예선 일정이 마무리 되었던 것이다.
- ↑ 특히 2차전은 후반 10분 경, 차태성 선수가 퇴장당한 상황에서 일구어낸 승리라 더욱 의미가 남달랐다.
- ↑ 물론 이 경기 이전에도 한국 대표팀이 1회 아시안컵에서 이스라엘을 2:1로 이긴 경험이 있긴 했다. 아예 모르는 상대는 아니었던 셈.
- ↑ 효창운동장은 최대 수용인원이 1만 8천에 불과한 구장이다.
- ↑ 월간축구 1981년 11월자를 보면, 최정민 씨는 이스라엘에서의 경기 득점자를 조윤옥과 우상권이 아닌, 자신이 2골을 넣고 김동근 선수가 1골을 넣은 것으로 잘못 서술하고 있다. 아무래도 오래전 일이라서 기억에 혼선이 있었던듯..
- ↑ 중화민국과의 경기 도중, 한국 선수단이 주심에게 강하게 항의를 퍼부었고 관중 난입 등 소요가 일어나자 주심이 몰수패를 선언해 결국 한국이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한 사건을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1960년 로마 올림픽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