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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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낙운 (1923년 2월 2일 ~ 1997년 5월 28일)은 대한민국 국적의 전직 축구 선수이자 축구인이다.
프로필
- 이름 : 성낙운
- 생년월일 : 1923년 2월 2일
- 학력 : 동국대학교 졸업
- 국가대표 경력
-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예선ㆍ본선 대표
- 1954년 마닐라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아시아예선 대표
- 1956년 AFC 아시안컵 예선ㆍ본선 대표
-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 (통산 A매치 18경기 출장 10골)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선수 생활
서울 태생으로 1948년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뒤 김용식 씨의 스카우트로 조선전업에 입단하였으며, 이영창ㆍ김규동 씨 등과 함께 조선전업의 공격진을 구성하며 활약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성씨는 군에 입대하게 되며 1960년까지 병참단 소속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에도 붙박이로 발탁되어 각종 국제대회에서 활약한 뒤 선수 생활을 정리하였다.
은퇴 이후
1961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성씨는, 이후 심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65년에는 FIFA 국제 심판으로 부임하여 1980년까지 심판으로 활동하였다. 동시에 1970년에는 맹명섭, 이우현, 김영진 씨 등과 함께 대한축구협회 산하 심판위원회를 구성하여 이전까지 경기 당 7~800원을 받던 심판비를 경기당 2천원으로 끌어올리고, 축구 규칙서를 통일하는 등 심판 권익 향상에도 기여하였다. 여기에 1971년부터 1981년까지 10여년간 충의, 육군 축구팀 감독으로 활동하며 이강조 등 수많은 선수들을 발굴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1981년 킹스컵에 참가하여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에 충의가 0:2로 패배를 당하자, 이에 책임을 지고 충의 감독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로는 축구 원로로 활동하다 1997년 5월 28일 새벽 3시 40분,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눈을 감으셨다. 향년 71세.
에피소드
- 심판으로 활동하던 시절 별명이 '도깨비'였다. 선수들이나 코치들이 온갖 수를 써서 항의를 해도, 한 번 내린 판정은 번복을 하지 않아 붙은 별명이라고..[1]
같이 보기
참고
- ↑ 바꿔 말하면 그만큼 선수들에게 수난도 많이 당했다. 일례로 1965년에는 제일모직 vs 금성방직 경기에서 제일모직의 김홍복에게 옐로우 카드를 줬는데, 김선수가 욕설을 퍼붓자 주저없이 레드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문정식, 고일남 등 제일모직 선수들이 몰려들어 성주심을 집단 구타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고, 1974년 6월 18일에는 신탁은행 vs 국민은행 경기에서 전반 종료 10초 전 국민은행이 선취골을 득점하자, 신탁은행의 이세연 골키퍼에게 '왜 전반 종료 휘슬을 늦게 부느냐!'며 멱살잡이를 당했고, 게임이 종료된 뒤에는 거꾸로 국민은행 트레이너였던 정명근 씨에게 온갖 욕설을 듣는 등 1경기에서 2차례나 수모를 겪기도 했다. 참고로 해당 경기는 국민은행 최운향 선수가 이명인 부심을 걷어차기도 하고, 선수들끼리 주먹질을 하는등 온갖 망신스러운 모습이 터진 최악의 경기였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경기가 대통령배 금융단축구대회 결승전이었다는 점.. 참고 기사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