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낙운

풋케위키, 대한민국 대표 축구위키 FootballK WIKI-
14.32.209.104 (토론)님의 2017년 3월 27일 (월) 19:32 판 (새 문서: '''성낙운''' (1923년 2월 2일 ~ 1997년 5월 28일)은 대한민국 국적의 전직 축구 선수이자 축구인이다. == 프로필 == * 이름 : '''성낙운''' *...)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성낙운 (1923년 2월 2일 ~ 1997년 5월 28일)은 대한민국 국적의 전직 축구 선수이자 축구인이다.


프로필

  • 이름 : 성낙운
  • 생년월일 : 1923년 2월 2일
  • 국가대표 경력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예선ㆍ본선 대표
1954년 마닐라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아시아예선 대표
1956년 AFC 아시안컵 예선ㆍ본선 대표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통산 A매치 18경기 출장 10골)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선수 생활

서울 태생으로 1948년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뒤 김용식 씨의 스카우트로 조선전업에 입단하였으며, 이영창김규동 씨 등과 함께 조선전업의 공격진을 구성하며 활약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성씨는 군에 입대하게 되며 1960년까지 병참단 소속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에도 붙박이로 발탁되어 각종 국제대회에서 활약한 뒤 선수 생활을 정리하였다.


은퇴 이후

1961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성씨는, 이후 심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65년에는 FIFA 국제 심판으로 부임하여 1980년까지 심판으로 활동하였다. 동시에 1970년에는 맹명섭, 이우현, 김영진 씨 등과 함께 대한축구협회 산하 심판위원회를 구성하여 이전까지 경기 당 7~800원을 받던 심판비를 경기당 2천원으로 끌어올리고, 축구 규칙서를 통일하는 등 심판 권익 향상에도 기여하였다. 여기에 1971년부터 1981년까지 10여년간 충의, 육군 축구팀 감독으로 활동하며 이강조 등 수많은 선수들을 발굴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1981년 킹스컵에 참가하여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에 충의가 0:2로 패배를 당하자, 이에 책임을 지고 충의 감독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로는 축구 원로로 활동하다 1997년 5월 28일 새벽 3시 40분,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눈을 감으셨다. 향년 71세.


에피소드

  • 심판으로 활동하던 시절 별명이 '도깨비'였다. 선수들이나 코치들이 온갖 수를 써서 항의를 해도, 한 번 내린 판정은 번복을 하지 않아 붙은 별명이라고..[1]


같이 보기

참고

  1. 바꿔 말하면 그만큼 선수들에게 수난도 많이 당했다. 일례로 1965년에는 제일모직 vs 금성방직 경기에서 제일모직의 김홍복에게 옐로우 카드를 줬는데, 김선수가 욕설을 퍼붓자 주저없이 레드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문정식, 고일남 등 제일모직 선수들이 몰려들어 성주심을 집단 구타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고, 1974년 6월 18일에는 신탁은행 vs 국민은행 경기에서 전반 종료 10초 전 국민은행이 선취골을 득점하자, 신탁은행의 이세연 골키퍼에게 '왜 전반 종료 휘슬을 늦게 부느냐!'며 멱살잡이를 당했고, 게임이 종료된 뒤에는 거꾸로 국민은행 트레이너였던 정명근 씨에게 온갖 욕설을 듣는 등 1경기에서 2차례나 수모를 겪기도 했다. 참고로 해당 경기는 국민은행 최운향 선수가 이명인 부심을 걷어차기도 하고, 선수들끼리 주먹질을 하는등 온갖 망신스러운 모습이 터진 최악의 경기였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경기가 대통령배 금융단축구대회 결승전이었다는 점.. 참고 기사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