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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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환(1938년 2월 9일~)은 대한민국 국적의 축구선수이자 축구인으로 수많은 팀을 맡아 이끌었던 전설적인[1] 지도자이다.



선수 프로필[편집]

  • 이름 : 박종환
  • 생년월일 : 1938년 2월 9일생
  • 선수경력
클럽축구팀 경력
연도 소속팀
1960 ~ 1963 경희대학교 축구부
1964 ~ 1966 대한석탄공사 축구단


국가대표 경력
연도 소속팀
1960 AFC U-19 챔피언십 우승
1962 메르데카배 국제축구대회 참가
1964 1964년 도쿄 올림픽 강화훈련 참가


지도자 프로필[편집]

  • 지도자 경력
연도 소속팀 직책
1966 ~ 1969 단국공고 축구부 감독
1970 ~ 1972[2] 성남고등학교 축구부
1973 ~ 1974 유신고등학교 축구부
1975 전남기계공고 축구부
1976 ~ 1988 서울시청 축구단
1982 ~ 1986 청소년대표88 올림픽대표팀
1989 ~ 1995 일화 천마 일화 천마
1995 ~ 1996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1999 ~ 2002 숭민 원더스
2003 ~ 2006 대구 FC 대구 FC
2014 ~ 2014. 4. 22 성남 FC 성남 FC


  • 수상 경력
연도 소속팀 업적
1992 일화 천마 일화 천마 K리그 컵대회 우승
1993 ~ 1995 K리그 우승 (3연패)
1996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 K리그 감독 기록
소속팀 리그 연도 리그
순위
컵대회 FA컵 아챔
일화 천마 일화 천마 K리그 1989 6 21 13 5위 미개최 미개최 -
1990 7 10 13 6위 -
1991 13 11 16 5위 -
1992 13 19 8 준우승 우승 -
1993 14 12 9 우승 5위 -
1994 17 11 8 4위 -
1995 16 13 6 준우승 우승
대구 FC 대구 FC 2003 7 16 21 11위 미개최 -
2004 9 16 11 10위 9위 -
2005 12 9 15 9위 7위 -
2006 10 16 13 7위 13위 -
성남 FC 성남 FC 클래식 2014 2 3 4 중도 사임
통산 (K리그) 클래식 - 124 154 133 K리그 3연패, 컵대회 1회
ACL 1회 우승


선수 시절[편집]

황해도 옹진군 출신으로 1945년 고향인 옹진군을 떠나 강원도 춘천시 약사동에 정착하였으며, 춘천중학교와 춘천고등학교, 경희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주 포지션은 라이트 풀백으로 빠른발을 이용해 끝까지 상대 선수를 따라다니기로 유명한 악바리 수비수 였다고. 춘천고 3학년 졸업반 시절 대학팀의 스카우트를 받는데 실패하여,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녔던바 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청소년대표 선발전에 나가게 된 박종환 선수는 악착같이 뛰어, 대표팀에 뽑히게 되었고 1960년 제 2회 AFC U-19 챔피언십에 나가 우승까지 차지하고 돌아오게 되었다.[3] 덕분에 대학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오게 되어, 경희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경희대를 졸업하고서는 대한석탄공사 축구단에 입단했다. 석공 시절 올림픽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태극마크를 다는듯 했지만... 올림픽대표 연습경기에서 큰 부상을 당하게 되어, 결국 올림픽 출전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후 크게 실망한 박종환은 선수 생활을 정리하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2년 더 석공에서 뛴 뒤 은퇴를 선언하고 지도자의 길을 걷기에 이른다. 요약하자면, 감독 시절의 화려함에 비해 선수 시절은 무명에 가까웠던셈.


지도자 생활[편집]

추가해야 함 'ㅅ'


지도 스타일[편집]

  • 군대식 합숙문화와 동계전훈에서의 살인적인 체력보강 훈련등 소위 스파르타식 훈련박종환 감독의 스타일이다. 덕분에 빠따로 선수를 패면서 조련한다더라는 박빠따라는 별명도 붙었다. 젊은 시절에는 그러했을지는 모르나 일화 천마 감독직 이후로는 굳이 빠따를 들지않더라도 선수들이 알아서 기가죽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선수들을 지휘했다. 선수들은 박감독의 스타일에 크게 반발했을법도 하지만, 애초에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 싶은 선수들만 박종환 감독이 뽑아온 탓에 군소리없이 훈련에 매진했다고.
  • 훈련 스타일이 스파르타라면, 전술적인 스타일은 소위 정형화된 5가지의 툴을 선수들에게 반복 훈련하여 주입시키고 상황에 따라 박종환 감독이 5가지 전술중 하나를 지시하면 그에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전술 스타일을 고집하였다.[4] 이같은 방식은 선수들이 능동적으로 경기상황에 맞춰 플레이를 바꾸기보다 감독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하기 때문에, 팀워크와 박종환 감독에 대한 선수단의 절대적인 믿음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 이런 훈련과 전술 스타일의 최대 강점은 평균 수준의 선수 자원을 가지고도 조직력과 경기 운영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구 FC 감독 시절의 대구의 선수단 수준과 경기력을 떠올린다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다만 이 같은 스타일의 최대 약점은 감독의 비중이 너무도 막중하다는데 있다. 때문에 선수들은 박종환 감독의 그늘을 벗어나면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져갔다.[5]


에피소드[편집]

  • 서울시청 축구단 감독 시절이었던 1970년대에는 지도자 뿐만 아니라 국제심판 자격으로도 다방면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심판 출신 지도자라면 누구보다 심판의 권위를 존중해야 할거 같은데, 일화 천마 감독 시절 경기 도중 주심에게 폭력 행사를 가해 징계를 먹기도 했었다.
  • 개그맨으로 유명한 故 이주일 씨와 절친이었다. 이주일 씨는 춘천고등학교 시절까지 박종환 감독과 함께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엿다.
  • 경기가 마음에 안들면 하프타임에 라커룸 집기를 집어던지면서 선수들에게 불벼락을 내리곤했다. 이후 후반에 뒤집은 경기가 셀수없이 많다.[6] 이런 거침없는 성격은 대구 FC 감독 시절에도 그대로였다. 한번은 대구 FC와 대학 축구부와의 연습경기 도중, 대학 선수가 대구 FC 선수에게 백태클 시전 후 다이렉트 퇴장을 당했는데 쓰러져 괴로워하는 대구 선수에게 눈길 한번 주지않고 대학선수가 퇴장하자 박감독이 폭발. 그 자리에서 대학 선수의 뺨을 갈겨버렸고 대학 축구부 감독 및 심판들도 (..) 박감독을 진정시키느라 경기가 중단되었던바 있다. 문제는 성남 FC 감독을 맡은 2014년에도 이런 모습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거.. 결국 이같은 행실이 2014년 4월 22일 불명예 퇴진을 당하는데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 언행도 거침이 없고 관록이 묻어나는 편이다. 특히 대구 감독 시절, 내가 수원 감독이면 눈 감고도 우승할 수 있다!는 발언으로 선수가 없다는 타령을 하던 강팀 감독들에게 일침을 가했고 덕분에 국내축구갤러리 등지에서 호평을 받은바 있다. 하지만 성남 FC 지휘봉을 받은 뒤로는..


갤러리[편집]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 [1] (박종환 감독 훈련 스타일 관련 기사)


참고[편집]

  1. 이중적인 표현이다. 긍정적인 측면(성적)에서도 전설적이지만 부정적인 측면(선수/심판 폭행 등)에서도 전설적인 인물..
  2. 월간축구 1973년 1월호에 따르면, 1972년 9월 성남고 축구부가 해체된 뒤, 박종환 씨는 동국대학교 코치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73년께부터 유신고등학교 축구부 코치 겸 주심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면 동국대 코치는 임시적으로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3. 당시 박종환 감독 이외에도 청소년대표에 김삼락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 감독, 故 차경복성남 일화 천마 감독, 故 조윤옥대우 로얄즈 감독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4. 이 때문에 혹자는 선수들이 박감독의 손가락만 보며 움직인다하여 손가락 전술이라 호칭하기도..
  5. 강력한 체력 훈련을 바탕으로 한 정형화된 전술 틀의 운용 측면에서 2002 FIFA 월드컵 당시 한국 대표팀을 이끌었던 후스 히딩크의 지도 스타일과 유사한 형태다.
  6. 빳따를 맞지는 않았다고 하더라. 다만 몇몇 선수의 뺨이 벌개진걸 목격한 팬들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