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FIFA 스위스 월드컵

F1tuscani (토론 | 기여)님의 2012년 8월 14일 (화) 02:40 판 (→‎아시아 예선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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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954년 FIFA 스위스 월드컵이란, 1954년 6월 16일부터 7월 4일 사이에 스위스에서 개최된 월드컵을 말한다. 줄여서 흔히 1954년 월드컵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이 참가한 첫번째 월드컵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참가국과 조편성

본선에는 총 16개 국가가 참가하였는데, 이 중 개최국인 스위스와 전대회인 1950년 FIFA 월드컵 우승팀 우루과이는 자동진출권을 획득하여 총 14장을 놓고 월드컵 예선이 벌어지게 되었다. 지역 예선은 유럽, 남미, 북중미, 아시아로 나누어 치루어졌고, 유럽 12개국, 남미 2개국, 북중미 1개국, 아시아 1개국이 예선을 거쳐 참가하게 되었다.


한국의 참가

아시아 예선

첫 월드컵 본선참가를 위해 한국 대표팀은 극동지역 예선전을 거쳐야만 했다. 극동지역 예선 상대국은 일본 이었는데, 원칙적으로 FIFA의 규정에 따라 일본과의 예선은 홈&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치루어야만 했다. 그러나, 1954년이면 일제강점기로부터 한국이 독립한지 불과 10년도 안되었던 시절이라 일본선수들이 국내에 입국하여 경기를 치룬다는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심지어 한국 선수들이 일본에 가서 경기를 하는 것도 못마땅히 여길 정도였다.[1] 자칫 지역예선이 한국의 기권으로 끝날 위기에서 재일대한체육회 신희 씨와 재일사업가 정건영 씨가 이승만 대통령을 적극 설득했고, 당시 한국 대표팀 감독 이유형 씨가 반드시 일본을 이기고 돌아오겠다. 만약 일본을 이기지 모하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각오를 전달하고나서야 일본에서 2경기 모두 치룬다는 전제하에 예선전 참가허가가 떨어졌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사된 54년 월드컵 극동지역예선은 1954년 3월 7일과 14일 도쿄 메이진진구 경기장에서 개최되었다.[2] 극동지역예선 1차전에서, 한국 대표팀은 GK 홍덕영, FB : 박규정, 이종갑, HB : 이상의, 민병대, 강창기, FW : 최광석, 성낙운, 최정민, 정남식, 박일갑을 출전시켰으며, 1차전에서 선취골을 일본에 내주긴했으나 한국팀은 5골을 퍼부으며 1차전을 5:1로 마무리했다. 이어진 2차전에서는 일본이 거칠게 경기를 진행하면서 김지성 선수의 이빨이 부러지는 등 사고가 있었으나 한국은 주눅들지 않으며 경기를 진행해 2:2 무승부로 1승 1무의 성적으로 극동지역예선을 통과해 본선무대에 참가하는데 성공하였다.


아시아 예선 결과

1954년 월드컵 대표팀이 치룬 아시아예선 결과는 이하와 같다.

본선 대표팀 선발과 최종 명단

아시아예선을 통과한 월드컵대표팀의 본선 참가를 위해 대한축구협회는 1954년 5월 22일부터 24일까지 선발전을 거쳐 스위스 월드컵 대표팀 최종 엔트리를 구성하였으니 이는 다음과 같다.

파일:1954년 한국대표팀.jpg
당시 한국대표팀 선수들 사진 중 일부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스탭진
감독 김용식 KFA 작고
선수단
GK 홍덕영 조선방직 작고
함흥철 헌병사령부
FB 박규정 병참단
이종갑 특무대
박재승 특무대 생존[3]
HB 이상의 조선방직 작고
강창기 조선방직
민병대 특무대
한창화 특무대
김지성 특무대
주영광 해군
FW 박일갑 특무대
정남식 첩보대
이수남 특무대
성낙운 병참단
최영근 ?
최정민 특무대
이기주 ?
우상권 헌병사령부
정국진 해군

※ 현 소속팀은 2012년 8월 1일 기준입니다.


본선대회

참가과정

독립한지 10년이 채되지 않은데다, 정부수립 후 불과 6년, 여기에 6.25 동란까지 겪은 직후의 첫 국제대회 참가였던지라 한국대표팀은 본선티켓을 따냈음에도 본선대회가 열리는 스위스까지 가는 것 자체부터 험난한 장벽의 연속이었다. 총 22명의 한국선수단은 1954년 6월 10일, 스위스 월드컵 출정을 위해 여의도비행장[4]을 출발해 일본 도쿄 하네다에 도착했다. 하지만 하네다에서 스위스 취리히로 가는 공항편을 쉽게 구할 수 없던데다 현지사정도 밝지 못했던 대표팀은 하네다공항에서 4일동안 발이 묶인채 시간을 허비해야했다. 간신히 재일체육회의 도움으로 스위스 취리히 항공편을 구해 6월 13일, 하네다공항을 떠나 스위스 취리히로 출발하였고,[5] 하네다공항을 떠난 선수단은 필리핀 마닐라, 베트남 하노이, 인도 캘커타, 파키스탄 카라치, 시리아, 이탈리아 로마로 이어지는 대여정끝에 하네다 출발 64시간만인 6월 16일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회는 6월 16일 이미 개막된 상태였고, 한국의 1차전 경기는 선수단이 도착한지 불과 15시간 뒤인 6월 17일 오후 3시에 예정되어 있었다. 시차의 문제, 64시간동안의 여행피로 누적등을 풀 시간적 여유도 없는 상태로 대표팀은 당대 최강을 자랑하던 헝가리와의 일전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를 회고한 김용식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50여시간을 비행기 의자에 앉아있다보니 선수들의 양복바지가 모두 무릎위까지 말려올라가 취리히에 도착한 직후 선수들은 올라간 바지부터 내리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만큼 선수단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1차전 (對 헝가리)

파일:1954년 한국대표팀1.jpg
헝가리와의 경기를 앞두고 푸스카스와 악수를 나누는 한국팀 주장 주영광 씨 (우)

한국은 본선 참가국 16개국 가운데, 헝가리, 터키, 서독과 함께 본선 B조에 편성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B조 첫상대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고, 1953년에는 축구 종가를 자처하던 잉글랜드를 6:3과 7:1로 박살내버린 당대 최강 헝가리였다. 이런 헝가리를 상대로 대한민국 선수들이 내세울건 악바리 정신밖에 없었다. 하지만 악바리 정신만으로 모든걸 이겨내기엔 시차, 여행피로, 기후, 음식, 실력차까지 너무 많은 점이 헝가리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6월 17일 취리히에서 열린 경기에서 한국팀은 전반 10분 동안은 대등한 경기를 펼치기도 했으나[6] 작은대포 푸스카스 (푸슈카쉬)를 시작으로 헝가리의 득점포가 연이어 터져나왔다. 전반 4골을 실점하며 어떻게든 버티던 한국팀이었으나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피로누적으로 인한 체력고갈은 현실로 다가왔다. 경기 도중 민병대, 최정민, 성낙운, 우상권, 강창기, 박일갑 등의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주저앉고 말았던 것. 결국 필드 플레이어들이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홍덕영 선수는 헝가리 선수들의 슈팅을 막아내야 했다.[7] 결국 헝가리는 손쉬운 상대 한국을 유린하며 후반 20여분을 남기고 4골을 몰아치며 9:0 완승을 챙겨갔다. 한국의 0:9 패배 였다.

비록 한국이 0:9로 패배하긴 했지만, 한국이 치욕적으로 못한 경기는 아니었다. 위에 예시로 들었듯 축구 종가를 자처하는 잉글랜드마저 1:7로 박살날 정도로 당대 헝가리는 세계최강의 팀이었다. 같은 대회인 1954년 월드컵 예선에서 서독은 헝가리에게 3:8 대패를 당했을 정도. 하지만 서독은 끝끝내 헝가리를 물리치며 이 대회 우승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즉, 한국은 악조건 속에서도 0:9로 헝가리에게 버텨냈으니 오히려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결과였다.[8]


2차전 (對 터키)

파일:1954년 한국대표팀2.jpg
터키와의 경기를 앞두고 기념촬영한 한국팀 베스트 11



결과 요약


경기수 승리 무승부 패배 득점 실점 골득실 승점
틀:나라자료 헝가리 헝가리 2 2 0 0 17 3 +14 4
틀:나라자료 터키 터키 2 1 0 1 8 4 +4 2
  서독 2 1 0 1 7 9 -2 2
  대한민국 2 0 0 2 0 16 -16 0
  • 0승 2패로 조별예선 4위 기록. 본선 조별예선 탈락.


같이 보기


참고사항

  1. 왜냐하면 국외로 선수단이 나가 경기를 하려면 체류비 등 외화가 필요한데, 당시 이승만 정부는 외화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2. 여담으로 이 경기가 최초의 한일전이었다.
  3. 2009년 김현회 기자의 기사 이후로 생존여부가 분명치않음 자세한건 추가바람. [1]
  4. 당시는 서울 여의도에 공항이 있었다. 지금의 김포로 공항이 옮겨진건 1958년 이후의 일.
  5. 당시 6월 13일 표도 20장만을 구해 22명인 대표팀이 타기엔 좌석수가 모자랐으나, 사정을 들은 영국인 부부가 좌석을 양보해줘 간신히 스위스로 출발할 수 있었다.
  6.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최정민 선수가 1:1 찬스도 잡았었다고 한다. 이때 한국이 선취골을 넣었다면 좋았을걸..
  7. 당시 홍덕영 선수의 선방이 없었다면 15:0도 가능했다는게 중론이다. 훗날 회고에서 홍덕영 씨는 헝가리 선수들의 슈팅을 막을때마다 바위를 막는 기분이셨다고. 경기 끝난 후 온몸에 멍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8. 그러나 대부분 한국축구사에서 스위스 월드컵은 본선 참가에 의의를 두는 잊고싶은 대회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