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일

Pyubi (토론 | 기여)님의 2013년 12월 13일 (금) 19:3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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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경일.jpg
대구 시절 김경일

김경일(1980년 8월 30일~현재)은 대한민국 국적의 미드필더로, 한 때 한국 축구의 천재로 당대의 화제가 되었던 선수다. 현재는 '김경일 축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동명이인으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김경일이 있다.




프로필

  • 리그 기록
소속팀 리그 연도 출장 교체 득점 도움 슈팅 경고 퇴장
전남 드래곤즈 K리그 1999 3 2 0 0 1 0 0
전남 드래곤즈 2000 8 7 0 0 15 1 0
전남 드래곤즈 2001 12 11 0 0 11 1 0
전남 드래곤즈 2002 0 0 0 0 0 0 0
전남 드래곤즈 2003 0 0 0 0 0 0 0
대구 FC 2004 6 6 0 1 6 1 0
대구 FC 2005 0 0 0 0 0 0 0
서산 시민구단 KNL 2005 1 1 0 0 - 0 0
통산 K리그 - 29 26 0 1 33 3 0
통산 KNL - 1 1 0 0 - 0 0
통산 전체 - 30 27 0 1 33 3 0


유소년 시절

김경일은 1996년 광양제철고등학교의 창단 멤버로, 당시 광양제철고 초대 감독이었던 기영옥 씨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광양 제철고에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광양제철고는 창단 2년만에 97,98 2년 연속 전국대회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게 되는데 고교 축구 인사들은 광양제철고 전력의 8할이 김경일 선수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기영옥 감독은 지금은 기성용 선수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90년대 금호고등학교 감독 재임시절, 윤정환, 고종수 등 천재 미드필더를 길러낸 장본인으로 고교 축구계의 마이다스 손으로 통했다. 때문에 고교 축구계에서는 기영옥 감독의 3번째 작품은 김경일 선수라고 입을 모았고 기영옥 감독 스스로도

고3 시절 김경일 선수의 실력은 같은 나이때의 윤정환, 고종수를 뛰어넘었다.

고 회고할 만큼 김경일의 천재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극단적인 예로 당시 광양제철고 주전 스트라이커는 김해출이었는데 이 선수는 96,97 2년 연속 이동국 선수와 고교 득점왕 경쟁을 벌일 정도로 잘 나갔던 선수였다. 그러나 프로팀 스카우트들의 평가는 냉정하기 그지 없어 '김경일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반쪽짜리 선수'라는 평이 나왔고, 실제로 전남 드래곤즈에 우선지명 형식으로 입단했으나 리그 3경기 교체출장에 그치며 소리소문없이 방출된 뒤 은퇴했다. 가끔 김해출을 비운의 유망주로 꼽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정도의 기량은 아니었다는 평.

이처럼 초고교급 유망주이자 한국 축구의 기대주로 통했던 김경일은 1999년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하였다. 1998년 K리그 신인선수상 수상자인 이동국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할 당시 계약 조건과 거의 동등한 대우를 받았을 정도로 전남의 기대는 컸다. 거기에 U-20 대표팀에도 선발, 1998 U-19 아시아 청소년선수권 대회때부터 주전이었던 정용훈을 밀어내고 1999년 나이지리아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본선에 참가하게 되었다.

청소년대표 시절

여기에는 당시 U-20 청소년대표 감독이 98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우승을 이뤘던 박창선에서 조영증으로 전격 교체되면서 조영증이 구상한 4-3-3 플랫의 구심점으로 김경일이 점찍힌 것이 컸다. 99년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가 개막하자 한국 언론은 '이번에야 말로 4강 신화 재현!' 을 외치기 시작했다. 특히 혜성처럼 등장해 조영증 감독의 신임을 받으며 주장 자리까지 맡게 된 김경일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특히 KBS에서는 특집 방송으로 김경일의 광양제철고 시절 활약을 자세히 소개하며 윤정환의 패스와 서정원의 활동량을 가진 천재 미드필더 등 엄청난 찬사를 하였고, 따라서 전국민적 관심이 김경일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본선 3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하며 이목을 끌었음에도 기대 이하의 플레이를 보이며 실망을 안겼다.

조영증은 김경일에게 96 애틀란타 올림픽에서의 윤정환과 같은 플레이메이커의 경기조율과 창조적인 공간 창출을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김경일은 상대팀이었던 포르투갈, 우루과이 선수들의 압박과 몸싸움에 맥없이 무너지며 장기인 전진 패스 시도 조차 시도하지 못 했다. 종국에는 한국 수비수들이 중원의 김경일 선수를 무시하고 공격진에 롱패스를 시도하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빌드업에 문제가 생겼고, 청대는 전술적으로 자멸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조영증의 선발진 구성 미스와 당시로서는 생소한 전술이었던 4-3-3을 3-5-2에 익숙해있던 선수들에게 억지로 밀어붙인 실책도 작용했다. 마지막 말리전에서 4:2로 승리하며 체면치레는 했지만, 라이벌인 일본이 준우승을 차지했기에 충격이 더했다. 결국 99 청대의 참담한 실패에 대한 비난은 조영증과 김경일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지고 말았다.


전남 시절

하지만 조영증은 김경일에 대해 '이제 국제경험도 쌓았으니 더욱 성장할 것이다.'라고 따로 언급할 정도로 김경일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1999년 K리그가 개막하기 전부터 올해의 K리그 신인왕은 김경일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흘러나올 정도로 김경일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컸다. 그러나 리그 3경기 출장만에 새끼발가락 피로골절 판정을 받으며 최소 6개월의 재활이 필요한 상황이 찾아왔다. 사실상 시즌 아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거기다 부상이 완쾌되지도 않았는데 재활 3개월만에 조급하게 복귀하려다 다시 시즌 아웃되었고, 2000시즌 후반기까지 단 한 경기도 나오지 못 했다.

그렇게 2년이 흘러 2001년 안양 LG 치타스와의 경기에서 오랜만에 투입되며 기대를 모았지만 역시 교체 출장 몇번 만에 무릎 연골 파열 진단을 받게 된다. 전남의 배려로 독일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출국하였고, 수술 후 재활을 하던 중 부상이 악하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수술을 받았다. 결국 2003년까지 단 한 차례도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재활을 하고 회복 훈련을 할라치면 부상 부위가 계속해서 악화되었다고. 결국 5년동안 김경일에 대한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던 전남 드래곤즈도 그를 포기, 그는 결국 방출되고 만다.


대구 시절과 은퇴

2004년 대구 FC에 입단하였다. 당시 대구의 감독이었던 박종환은 어떻게 몸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가 있느냐며 안타까워했다고. 어떻게든 그 재능을 살려보려 대구에서도 노력해봤지만, 결국 2005년 6월, 선수 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의사의 선고와 함께 은퇴하게 되었다. 당시 진단으로 무릎이 자꾸 탈골된 이유가 알려졌는데, 선천적으로 무릎뼈의 바깥부분이 함몰돼 있는 기형이라 애시당초 축구화를 신어선 안되는 운명 이었다.

은퇴 후 축구교실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야깃거리

  • 윤원일인천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시절 한 인터뷰에서 '김경일에 대해, 실력이 있어도 프로로 성공할 수 없는 경우도 있구나'하고 말했다.[1]


같이 보기

외부 링크

참고

  1. 출처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