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샤2
드라큘리치 샤샤(DRAKULIC SASA)는 부산 대우 로얄즈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성남 일화 천마에서 맹활약한 선수이다. 그가 거친 팀중 우승 트로피를 들지 못한 팀이 없어 '우승 청부사'라는 별명이 불리워지고 있다.
프로데뷔
샤샤는 93-94 시즌 유고의 명문 레드스타 베오그라드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공격수였던 샤샤는 11경기에 나와 2골을 기록 신인으로써는 나쁘지 않은 기록을 세웠다.
부산 시절
베오그라드에서 축구선수 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날, 한 낯선 얼굴의 이방인이 샤샤를 찾아왔다. 바로 부산대우의 안종복 단장이였다. 당시 대우는 체코출신의 GK 코스텔니크(체코)를 테스트한 뒤 돌려보낸 상황이었다. 다시 외국인 선수를 찾기위해 출장을 나선 안 사장은 유고를 방문해 1부리그 레드스타의 리저브 멤버였던 샤샤를 영입 대상으로 낙점했다 안 사장은 "K리그에서 성공을 일군 라데도 있다. 너도 같이 한국으로 가자"고 설득했다. 당시 내전으로 불안하던 유고의 상황에서 안정적인 한국의 제의는 샤샤의 귀를 솔깃하게 했고, 베오그라드는 별로 비중이 크지 않았던 샤샤를 싼 값에 내줬다. 결국 대우는 30만달러의 비교적 저렴한 몸값으로 비행기에 태우는데 성공했다.
한국에 온 샤샤는 95시즌 25경기에 나서 8골을 기록, 라데를 밀어내고 득점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이듬해 샤샤는 왼쪽 발목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 탓인지 19경기 3골로 부진했다. 5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제몫을 해보이는 듯 했지만, 골을 넣어야하는 공격수로써 샤샤는 부진했다. 부산은 샤샤의 방출을 고려했지만 다시한번 샤샤를 믿었고 97시즌 샤샤는 놀라운 기량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샤샤는 그해 영입된 마니치와 단짝을 이루면서, 11골 4도움을 기록했다. 성적만 보면 평범할지 모르지만 그가 넣은 골들의 대부분은 승부를 결정짓는 골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샤샤의 효과는 마니치에게도 전이되면서 7골 3도움을 기록, 부산 대우의 K리그 우승, 리그 컵우승 등 전관왕 신화창조에 1등공신이 되었다.
수원 시절
98시즌에도 컵대회 4골을 기록한 샤샤는 공격진 부진으로 고생하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게는 공격보강의 마지막 퍼즐이었다. 당시 수원은 박건하가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미하이가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고, 전북에서 데려온 비탈리도 좋지못한 기량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샤샤는 자존심이 센 성격 탓에 코칭 스태프와 잦은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고, 부산은 샤샤를 보낼 팀을 찾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샤샤의 수원이적은 성사되었다. 이적료는 69만9천달러(한화 약 9억6천만원), 연봉 8만4천달러. 30만달러에 샤샤를 영입했던 부산은 2배의 가격에 되팔게 된 것이었다.
당시 수원에는 고종수 데니스 김진우 등 샤샤에게 좋은 볼을 배급해 줄 수 있는 미드필더들이 많았고, 샤샤는 물만난 고기마냥 골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정규리그 부천 SK와의 개막전에서 샤샤는 데뷔골을 터트렸고, 이에 자극받은 미하이와 비탈리가 폭발하며 팀의 5대1 대승을 이끌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시즌 종료까지 이어젔고 샤샤는 8골 1어시스트로 팀의 정규리그 우승에 앞장섰다. 샤샤는 챔피언결정전에서도 종횡무진 뛰어다녔고, 샤샤는 수원의 첫번째 우승을 이끌며 '우승청부사'라는 명성을 재확인 시켰다. 하지만 98 시즌은 샤샤에겐 서막에 불과했다. 99시즌 수원에는 서정원이 보강되었고, 샤샤는 미드필드진의 빵빵한 지원속에 상대팀 골문에 맹폭을 가했다. 당시 부산 소속이었던 안정환과의 득점경쟁이 샤샤의 득점본능에 불을 붙였고, 샤샤는 9월 부천과의 원정경기에서 4골을 집어넣는 등 대폭발 18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안정환을 밀어내고 득점왕에 올랐다. 당시 샤샤의 활약으로 수원은 창단 4년 만에 3개의 컵을 차지하는 진기록을 세웠고, 정규리그에서도 2위 부천을 멀찍이 따돌리고 우승을 확정지었다. 일찌감치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한 샤샤가 상대해야했던 팀은 친정팀 부산, 박건하의 결승골에 힘입어 승리한 수원은 2차전 수원에서 시즌을 끝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부산도 호락호락하게 물러나지 않아 1대1로 연장전에 접어들었다. 연장전반 8분 장지현의 왼발 크로스가 샤샤에게 날아갔고, 헤딩으로 따내기에 공이 너무 멀었다고 생각한 샤샤는 손으로 펀칭하듯이 공을 골대안으로 밀어넣었다. 명백한 핸드볼이었지만, 중국출신의 순바오제주심 의 퇴근본능 발동 은 이 어이없는 골을 인정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샤샤는 우승을 차지했고, 득점왕까지 거머쥐었음에도 불구하고 괘씸죄에 걸려 MVP를 안정환에게 내주고 말았다.<REF> 당시 샤샤는 "머리로 넣었는지 손으로 넣었는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라고 뻔뻔하게 말하면서 기자들의 분노를 샀고 결국 기자단 투표에서 결정되는 MVP를 타지 못했다.
J리그 시절
샤샤는 2000 시즌 황선홍의 트레이드 상대로 J리그 가시와 레이솔에 입단했다. 하지만, 부상과 모친상의 충격에 일본 적응기는 대실패 2경기만 뛰고 돌아왔다. 트레이드 상대로 수원에 입단한 황선홍도 무릎부상의 여파로 1경기만 출장하고 가시와로 되돌려 보내졌다 트레이드 사상 유래없는 국제 루즈-루즈 트레이드였다. 다시 수원으로 돌아온 샤샤였지만, 샤샤의 자리는 산드로로 채워져 있었고, 샤샤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결국 수원은 00시즌 종료후 샤샤를 자유계약 선수로 풀어버리고 말았다.
성남 시절
자유계약으로 풀린 샤샤는 뛸 팀을 모색했고, 전남이 임대계약을 제의하며 전남에 입단할 것으로 보였지만, 성남이 계약금 130만달러(약 15억 6,000만원),3년간 연봉 총액 90만달러(약 10억 8,000만원ㆍ매년 30만달러)의 좋은 조건을 제의하며, 성남 입단에 합의했다. 전성기가 지났다고 생각한 샤샤에 구단관계자들은 반신반의 했지만, 샤샤는 수원에서 뛰던 시절보다 더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2001년 25경기 10골 3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K리그 우승을 이끈 샤샤는 2002년 26경기 9골로 팀의 2연패에 공헌, 2003년 27경기 8골을 기록하며 팀의 3연패를 이끌었다. 샤샤는 2004년 리빌딩을 시작한 성남을 떠나 키프러스 리그의 AEK Larnaca로 이적했다.
이후
샤샤는 2005 Vojvodina Novi Sad → ČSK Pivara (loan) Mladost Apatin 팀과 Cement Beočin 팀 등에서 활약했다. 특히 2006-2007시즌 UEFA컵 하이버니안전에서 동점골을 성공시키는 등 제 2의 전성기를 맞는 듯 하였으나 부상은 그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결국 샤샤는 2010년 세르비아의 Cement Beocin을 끝으로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