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무
허정무(許丁茂, 1955년 1월 13일 ~ )는 대한민국 국적의 축구선수이자 축구인이다
프로필
선수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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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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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생활
유소년 생활
전남 진도군 출신으로 중동중학교, 영등포공고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허정무 씨가 축구를 하게된 계기가 제법 독특한편. 허정무 씨의 삼촌되시는 허윤정 씨는 당대를 대표하는 국가대표 축구 선수로, 한국 축구역사상 최초로 홍콩 세미프로팀과 입단계약을 체결하였던바 있다. 이 때 허윤정 씨는 홍콩 축구팀 진출을 기념해 자신의 고향인 진도에서 시범경기를 치루기로 하였는데, 이 때 허윤정 씨의 시범경기에 앞서 오픈게임으로 진도 어린이들의 축구경기가 펼쳐졌고 이 경기에서 허정무 씨가 발군의 활약을 보였다고. 이 때 허정무를 주목한 서울 중동중학교 축구부가 허씨를 스카우트 하여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영등포공고 시절부터 최종덕, 조광래 등과 함께 무서운 새내기로 주목을 받았던바 있으며, 연세대학교 재학시절부터 뛰어난 기량을 지녀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프로 생활
1978년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실업 축구단이었던 한국전력 축구단의 제의를 받아 입단하게 되었지만, 군 문제로 인해 곧바로 해병대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차범근이 1979년 독일 분데스리가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하여 활약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유럽진출을 고심하였고, 원 소속팀인 한국전력 측의 배려로 1980년 7월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PSV 에인트호번에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입단하였다. 당시에도 네덜란드 정상급 팀이었던 PSV에서 반년 정도 교체 멤버로 뛰다가 그 뒤로는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아 주전 선수로 활약하였고, 3시즌 동안 77경기에서 15골을 넣고 1982-83시즌 팀의 준우승에 기여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 1983년 집안 사정과 함께 국가대표 팀 문제로 인해 국내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4년 현대 호랑이의 창단 멤버로 입단하게 되었다. 1986년 FIFA 월드컵이 끝난 후 선수 은퇴를 결심하였고 1986시즌이 끝난 뒤 은퇴하였다.
국가 대표 생활
1974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하였다. 다재다능한 플레이로 매번 대표팀에 선발되었고 특히 1986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에서는 월드컵 진출을 결정짓는 골을 성공시키면서 32년만의 월드컵 진출의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이 후 본선 1차전 아르헨티나전에서는 디에고 마라도나를 끈질기게 마크하였다. 이 때 마라도나를 발로 걷어차 한국 축구는 '태권축구'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훗날 허정무 감독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때 마라도나가 아니라 볼을 걷어내기위해 발을 들었는데 마라도나가 달려들어서 충돌했던거라고 한다. 또한 본선 3차전 이탈리아전에서는 문전 앞에서 침착한 슈팅으로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A매치 통산 84경기에서 25골을 넣었다.
지도자 생활
2000년 이전
1991년에 포항 제철 아톰즈에 코치로 입단하여 활동하다 1993년 현대 호랑이로 옮겼다. 1990년 FIFA 월드컵에는 트레이너, 1994년 FIFA 월드컵에는 코치로서 각각 참가하였다. 1993년 포항 아톰즈 감독에 취임하여 그 해 아디다스 컵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1995년 시즌 도중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지만, 그 해 다시 K리그로 복귀하여 전남 드래곤즈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1997년 팀의 K리그 준우승과 FA컵 우승을 이끌었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1998년 시즌 도중에 1998년 FIFA 월드컵 도중 경질된 차범근 감독의 후임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고, 2000년 하계 올림픽 국가대표팀도 함께 맡게 되었다.
그러나 2000년 하계 올림픽에서 2승 1패를 올리고도 첫 경기였던 스페인전을 0 : 3으로 패한데 따른 후유증 (골득실차)으로 인해 8강 진출에 실패하고, 레바논에서 열린 2000년 AFC 아시안컵에서는 준결승전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에 패배해 3위에 머무르면서 2000년 10월 감독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후임으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취임하면서 7년여에 걸쳐 외국인 감독 체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허정무 감독이 팬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발탁했던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등은 세계적으로 성장하였고, 특히 2000년 하계 올림픽에서 얻은 2승 1패라는 성적은 역대 대한민국이 얻은 승점 중에 가장 높은 점수라는 데 의의가 있다.
2000년 이후
국가대표팀 사퇴 이후 2002년 FIFA 월드컵에 대비해 대한축구협회 기술 고문을 맡았다. 그 뒤 2004년에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고, 그 해 6월에 요하네스 본프레러 감독이 취임한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로 선임되었다. 예전에 지휘봉을 잡았던 전남 드래곤즈 감독에 다시 취임하여 7년 만에 복귀하였다. 2006년 8월 30일 K-리그 통산 9번째로 개인 통산 100승을 달성하였으며, 2006년과 2007년 팀의 FA컵 2연패를 이끌었고, 2006년 FA컵 당시에는 '최우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그 능력을 인정받아 핌 페르베이크 감독의 후임으로 2007년 12월 국가대표팀에 다시 선임되어 거스 히딩크 이후 움베르투 코엘류와 요하네스 본프레러, 딕 아드보카트와 핌 페르베이크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7년여에 걸쳐 외국인 사령탑 시대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2010년 월드컵 대장정
두 번째로 국가대표팀 감독에 취임하게 된 허정무는 "축구 인생을 걸겠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하겠다"라는 말과 함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본선 진출을 향한 대장정을 시작했다. 대한민국은 아시아 3차 예선과 최종예선을 거치게 되었는데, 3차 예선 첫 경기인 투르크메니스탄전을 4:0 승리로 장식하면서 좋은 출발을 했다. 그러나 북한과의 원정경기에서 득점없이 0:0 무승부를 거두고, 요르단과의 홈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거두는 무기력한 경기로 인해 비난을 받았다. 이후 요르단/투르크메니스탄 원정에서 각각 1:0/3:1 승리를 거두고 북한과의 홈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3승 3무, 3조 1위로 최종예선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2008년 6월 27일에 발표된 최종예선 조편성은 험난 그 자체였다. 대한민국은 중동의 강호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란, 3차예선에서 맞붙었던 북한, 그리고 중동의 복병 아랍 에미리트(이하 UAE)와 B조에 편성되었고, 이는 곧 아시아 최종예선 죽음의 조가 된 것이다. 특히 사우디 아라비아는 1989년 이후 19년간 이긴 적이 없는 까다로운 상대였고 이란 역시 상대전적에서 호각세를 이루는 까다로운 상대인데다 북한은 3차 예선에서만 2경기 연속 무득점 무승부를 기록한 힘든 상대였기에, 과연 허정무호가 본선에 진출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첫 경기는 북한과의 원정경기였다. 전반을 무득점으로 마치고 후반 20분 북한의 홍영조에게 페널티킥을 내줘 패배의 불길함이 감돌았지만 허정무 감독이 발탁한 신예 기성용이 불과 4분만에 동점골을 넣어 1:1로 경기가 끝났다. 이후 UAE와의 홈경기에서는 4:1의 대승을 거뒀고, 첫 번째 난관이 허정무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2008년 11월 19일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원정 경기였다. 그러나 전반을 잘 막아낸 대표팀은 후반 32분 이근호가 선제골을 넣으며 경기를 풀어나갔고 후반 46분에는박주영이 쐐기골까지 넣으며 마침내 19년 무승 징크스를 깨고 2승 1무로 조1위를 달리게 되었다. 사우디 아라비아 원정을 잘 마무리한 허정무호는 2009년 2월 11일 두 번째 난관인 이란 테헤란 원정 경기를 맞이하였다. 전반에 잘 싸우고도 후반 15분 자바드 네쿠남에게 프리킥골을 허용했지만 21분후인 후반 36분 박지성이 동점골을 넣어 1:1 무승부를 기록, '원정팀의 지옥'이라는 테헤란에서 한숨을 돌렸다. 이후 북한과의 홈경기에서 김치우의 후반 42분 결승골로 1:0의 승리를 거둬 마침내 무승부 사슬을 끊었고, 6월 6일 UAE와의 원정 경기에서 2:0의 승리를 거두며 마침내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으며 7연속 본선 진출을 달성하였다. 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적인 기록일뿐만 아니라, 죽음의 B조에서 남은 경기와 상관없이 조1위를 고수하는 기분좋은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이후 허정무호는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홈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하였고, 이란과의 홈경기에서는 후반 6분 쇼자에이에게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후반 36분 박지성이 동점골을 기록하여 1:1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이에 따라 허정무호는 최종예선에서 4승 4무 B조 1위로 무패 본선진출의 신화를 달성하였다. 특히 이란과의 무승부는 이란의 감독으로 부임한 前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코치 압신 고트비가 본선 진출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진 상황에서 일격을 가해 사실상 이란의 본선 진출 가능성을 좌절시킨 한판임과 동시에, 몇시간후 벌어질 북한의 사우디 아라비아 원정 경기에 한줄기 희망을 던져준 것이었다. 실제로 북한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0:0으로 비겨 B조 2위로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이후 2009년 12월 본선 조추첨에서 대한민국은 유로 2004 챔피언인 유럽 강호 그리스, 세계 최강 아르헨티나, 아프리카 강호 나이지리아와 B조에 편성되었다. 최악의 대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만한 대진도 아니었기에 허정무 감독은 최선을 다해 16강에 오르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러나 2010년 2월 10일 일본에서 열린 동아시아컵 2차전에서 중국에게 0:3으로 패배하면서 큰 위기를 맞았다. 무엇보다도 32년간 이어왔던 공한증을 마감함과 동시에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중국에게 진 감독이라는 불명예 또한 갖게 되었다. 경질 여론이 들끓었지만 월드컵 본선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기 때문에 실제 감독 교체는 이뤄지지 않았고, 마침내 월드컵 본선을 맞이하게 되었다.
2010년 6월 12일에 있었던 첫 경기 그리스와의 대결은 16강을 위해 반드시 잡아야 하는 경기였다. 초반부터 대한민국이 주도권을 잡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더니 전반 7분만에 기성용의 프리킥을 이정수가 받아넣어 앞서기 시작했고 후반에 박지성이 그리스 수비수의 공을 가로채 쐐기골을 넣으며 2:0 완승을 거두었다. 그리스의 철벽 수비에 고전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공격 중심의 전술로 꼭 필요했던 승리를 잡은 경기임과 동시에, 사상 최초로 한국인 감독이 승리를 거둔 사례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6월 17일 아르헨티나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는 수비 위주의 전술을 폈다가 번번이 수비가 뚫리는 위기 상황이 반복되었다. 0:2로 뒤진 전반 종료 직전 이청용이 상대 수비수의 공을 가로채 그림같은 골을 넣으며 1:2로 따라갔지만, 후반에 무리한 공격 진행을 통해 수비 뒷공간을 내 주어 2골을 추가로 내주며 결국 1:4로 대패하였다. 특히 허정무 감독이 줄기차게 투입하는 염기훈이 후반에 어이없는 슛으로 동점골 기회를 놓친 것이 결국 대패로 이어졌다는 지적도 있었다. 16강 진출 여부는 나이지리아와의 최종전으로 넘어갔다.
2010년 6월 23일, 16강의 운명을 결정지을 나이지리아와의 경기가 열렸다. 전반 초반 수비 실책으로 인해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첫 경기 그리스전 선제골의 주인공 이정수가 또 다시 기성용의 프리킥을 받아 동점골을 기록하였고, 후반 시작과 함께 박주영의 그림같은 프리킥 역전골이 터지면서 16강 진출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러나 허정무 감독이 교체투입한 김남일의 무리한 태클로 페널티킥 동점골을 허용하였고, 이후 여러차례 위기 상황이 발생했다. 다행히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고, 대한민국은 1승 1무 1패로 B조 2위를 기록, 사상 최초로 한국인 감독으로서, 원정 월드컵 16강을 달성하였다.
6월 26일에 펼쳐진 16강전의 상대는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였다. 특히 허정무 감독이 20년 전 1990년 월드컵에서 코치로 있을 적에 당했던 0:1 패배를 설욕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전반 초반 수아레즈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해 끌려가다가 후반 중반 이청용의 멋진 헤딩 동점골로 상승세를 탔지만, 다시 수아레즈에게 골을 허용해 1:2로 끌려갔다. 허정무 감독은 이동국을 투입했고 후반 42분 결정적인 기회가 왔지만, 수중전으로 인해 젖은 잔디로 공의 속도가 줄어 동점골을 넣는데 실패했다. 결국 우루과이에 1:2로 패배해 대한민국 대표팀은 16강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팀들 사이에서 그것도 원정 대회에서 16강에 진출했다는 의의가 있으며, 이를 국내 지도자인 허정무 감독이 일궈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축구 역사를 새로 쓴 대회였다. 대한축구협회에서는 허정무 감독의 유임을 시사했지만, 허정무 감독 본인은 재계약을 포기했다.
인천 유나이티드
2010년 8월 22일, 인천 유나이티드의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2010년 9월 4일 부로 인천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서 첫 경기를 치루었으며, 부산 아이파크와의 데뷔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하였으며 두번째 경기인 광주 상무와의 경기에서마저 후반 45분에 동점골을 먹히면서 무승부로 끝이 났다. 다만 3번째 경기인 대구 FC와의 22라운드 경기에서 4-1로 완승하며 인천에서의 첫 승을 거두는 데 성공했다. 23라운드 FC GS전에서는 0-2로 무너지며 인천 부임후 첫 패배를 당했다. 2011시즌은 6승 14무 10패로 13위를 기록하였다. 2012 시즌에는 리그 8위에 들어가지 못하면 감독을 그만두겠다고 공언하였다. 2012시즌을 앞두고, 유니폼 발표회가 있었는데 전통적인 청색-검은색 조합을 버린 것에 대해,
“ | 세계적인 팀들도 유니폼이 많이 바뀐다. 파란색을 전통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유니폼을 결정하면서 파란색이 인천시의 색이라고 해서 그 색상을 바탕으로 하고 나머지는 디자인에 맡겼다. | ” |
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유니폼 변경에 대해 감독의 발언이 어느 정도 위치를 점할 수는 있으나 팬들의 의견을 수렴하지도 않은 채, 자기 의견을 내세우며 팬들 위에 군림하려는 감독의 모습이 썩 좋게 비추어지지 않는다. 특히 파란색을 전통이라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말은 팬들의 의견과 인천 고유의 정체성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고 밖에.. 결국, 불안불안하게 2012시즌을 출발한 허정무호는 성적도 1승 1무 4패로 급전직하하며, 모든 인천 팬들의 신임을 잃게되었고, 결국 허정무는 2012년 4월 10일부로 자진 사퇴를 결정하였다.
에피소드
- 1960년대 석탄공사와 양지축구단에서 활약하였던 전직 국가대표 선수 허윤정 씨가 허정무 씨의 삼촌이다. 허정무 씨가 영등포공고에서 처음 청소년대표에 발탁될 때만 해도 허윤정 삼촌의 후광 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으나, 결국은 허정무 선수가 삼촌을 뛰어넘는 더 훌륭한 선수로 성장하였다.
- 2001년 초 KBS의 축구 해설 위원으로 데뷔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2002년 월드컵 때 KBS의 주요 경기 해설을 맡았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부터 현재까지 MBC 축구 해설 위원을 맡고 있다.
- 2012년, 인천 유나이티드에 2002년 월드컵의 영웅인 김남일, 설기현이 입단하면서 "허정무 감독과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었다"며 보은의 의지를 보인 바 있다. 여기에 호주 유망주 네이선 번즈 역시 "인천에 입단한 이유는 맨유, 토트넘 등에 진출한 선수를 발굴해 냈고 월드컵 16강에 한국을 진출시킨 감독이 인천에 있기 때문에 왔다" 라며 호주 언론에까지 인터뷰 하면서 새삼 허정무 감독의 인맥과 명성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혹자는 "이러다가 '바둑 두다 뽑았다'며 엄청나게 욕먹었던 박지성도 인천에 오는거 아니냐" 하는 말도 하고 있다.하지만, 허정무 감독이 물러나면서 허정무 감독을 보고 인천으로 온 선수들의 거취가 주목되고 있다.
경력
선수 경력
- 1978 : 한국전력 축구단 / 실업
- 1978 ~ 1980 : 해군 축구단 / 해병대 복무
- 1980 ~ 1983 : PSV 에인트호번 / 네덜란드 1부리그
- 1984 ~ 1986 : 현대 호랑이 / K리그
지도자 경력
- 1989 ~ 1990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트레이너
- 1991 ~ 1992 : 포항 제철 아톰즈 코치
- 1993 : 현대 호랑이 코치
- 1993 ~ 1995 : 포항 아톰즈 감독
- 1993 ~ 1994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 1995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1995 ~ 1998 : 전남 드래곤즈 감독
- 1998 ~ 2000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2004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 2005 ~ 2007 : 전남 드래곤즈 감독
- 2007 ~ 2010.8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2010.9 ~ 현재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축구 해설 경력
수상 이력
선수
대한민국
네덜란드
감독
대한민국
- 1997년 프로축구 빅스포상 수상
- 1997년 FA컵 지도자상 수상
- 1999년 AFC 선정 2월의 감독
- 2006년 FA컵 최우수 지도자상 수상
- 2007년 제21회 스포츠서울 올해의 프로축구 대상 올해의 감독상 수상
- 아디다스 컵 우승 1회 (1993년)
같이 보기
외부 링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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