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뀜
→유소년 생활
== 유소년 생활 ==
== 유소년 생활 ==
[[대구신암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한 유병수는 이후 [[대구청구중학교]], [[수서중학교]]에 이어 [[서울둔천중학교]]에 입학, 주전으로 활약하면서 매경기 1골씩 넣는 공격 재능을 과시하였다. 둔천중 3학년이었던 2003년, 1992년 [[K리그 득점왕]] 출신이자 당시 [[대신고등학교]] 코치였던 [[임근재]] 감독이 유병수를 유심히 지켜보고 대신고로 스카우트하여 골 넣는 노하우를 전수하였고, 발리슛으로 골을 적게 넣는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사는 '아이스크림 내기' 등을 통해 유병수의 골감각을 키워주는데 일조하였다. 이후 임근재 코치가 대신고를 떠나 [[보인고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하자, 유선수는 [[정종선]] 감독이 지휘하는 [[언남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그리고 언남고에서 유병수는 자신의 기량을 대폭발 시킨다. 2005년 [[백록기고교축구대회]]에 출전해 [[해트트릭]] 2회 포함 무려 12골을 쏟아부으면서 득점왕과 대회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갱신하는 활약을 보였다.<ref>언남고는 이 대회에서 [[박현범]]이 이끄는 [[금호고등학교]]에게 4강에서 패배하여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유병수는 이 대회를 통해 강한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ref> 이듬해인 2006년 다시 백록기에 서게된 유병수는 6골을 기록하면서 2년 연속 대회 득점왕에 올랐고, 도움왕에도 오르며 2관왕을 석권하였다. 또한 백록기대회에서만 개인통산 18골을 기록하며, 대회 사상 개인 최다 득점자에 오르는 기록도 세웠다. 이런 활약을 눈여겨 본 U-20 대표팀에 몇번 불려가면서 [[이청용]], [[기성용]], [[이상호]] 등과 한솥밥을 먹기도 하였다.
[[대구신암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한 유병수는 이후 [[대구청구중학교]], [[수서중학교]]에 이어 [[서울둔촌중학교]]에 입학, 주전으로 활약하면서 매경기 1골씩 넣는 공격 재능을 과시하였다. 둔천중 3학년이었던 2003년, 1992년 [[K리그 득점왕]] 출신이자 당시 [[대신고등학교]] 코치였던 [[임근재]] 감독이 유병수를 유심히 지켜보고 대신고로 스카우트하여 골 넣는 노하우를 전수하였고, 발리슛으로 골을 적게 넣는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사는 '아이스크림 내기' 등을 통해 유병수의 골감각을 키워주는데 일조하였다. 이후 임근재 코치가 대신고를 떠나 [[보인고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하자, 유선수는 [[정종선]] 감독이 지휘하는 [[언남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그리고 언남고에서 유병수는 자신의 기량을 대폭발 시킨다. 2005년 [[백록기고교축구대회]]에 출전해 [[해트트릭]] 2회 포함 무려 12골을 쏟아부으면서 득점왕과 대회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갱신하는 활약을 보였다.<ref>언남고는 이 대회에서 [[박현범]]이 이끄는 [[금호고등학교]]에게 4강에서 패배하여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유병수는 이 대회를 통해 강한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ref> 이듬해인 2006년 다시 백록기에 서게된 유병수는 6골을 기록하면서 2년 연속 대회 득점왕에 올랐고, 도움왕에도 오르며 2관왕을 석권하였다. 또한 백록기대회에서만 개인통산 18골을 기록하며, 대회 사상 개인 최다 득점자에 오르는 기록도 세웠다. 이런 활약을 눈여겨 본 U-20 대표팀에 몇번 불려가면서 [[이청용]], [[기성용]], [[이상호]] 등과 한솥밥을 먹기도 하였다.
언남고를 졸업한 뒤 [[홍익대학교]]로 진학한 유병수는 2차례 [[피로골절]]로 인해 청소년대표에서도 낙마하고 긴 재활 기간을 거치다 2학년이던 2008년 9월 [[추계1,2학년대학축구대회]]에서 도움왕에 오르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전국대학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2골을 넣는 등 맹활약, 6골을 기록해 대회 득점왕에 오른 뒤, [[2009년 K리그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된다.<ref>당시 홍익대학교에 유병수와 같이 재학 중이었던 선수는 [[한지호]], [[김성준]], [[김보경]], [[김원식]] 등이 있었다.</ref> 하지만 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 겪었던 무릎 부상으로 인해 프로팀 [[스카우터]]들은 유선수를 대학 최대어로 평가하지 않았다. 능력은 좋은데 부상 위험이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 덕분에(?) 당시 [[강원 FC]]는 드래프트장에서 16명을 우선지명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음에도 유병수 선수를 지명하지 않았다.<ref>당시 [[최순호]] 감독은 자신의 애제자 격인 [[울산현대미포조선]] 출신 선수들을 지명하는데 4장을 사용했고, 나머지 12장은 대학 선수들을 뽑는데 사용했는데 모두 미드필더와 수비수, 골키퍼를 지명하는데 12장을 사용했다.</ref>
언남고를 졸업한 뒤 [[홍익대학교]]로 진학한 유병수는 2차례 [[피로골절]]로 인해 청소년대표에서도 낙마하고 긴 재활 기간을 거치다 2학년이던 2008년 9월 [[추계1,2학년대학축구대회]]에서 도움왕에 오르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전국대학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2골을 넣는 등 맹활약, 6골을 기록해 대회 득점왕에 오른 뒤, [[2009년 K리그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된다.<ref>당시 홍익대학교에 유병수와 같이 재학 중이었던 선수는 [[한지호]], [[김성준]], [[김보경]], [[김원식]] 등이 있었다.</ref> 하지만 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 겪었던 무릎 부상으로 인해 프로팀 [[스카우터]]들은 유선수를 대학 최대어로 평가하지 않았다. 능력은 좋은데 부상 위험이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 덕분에(?) 당시 [[강원 FC]]는 드래프트장에서 16명을 우선지명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음에도 유병수 선수를 지명하지 않았다.<ref>당시 [[최순호]] 감독은 자신의 애제자 격인 [[울산현대미포조선]] 출신 선수들을 지명하는데 4장을 사용했고, 나머지 12장은 대학 선수들을 뽑는데 사용했는데 모두 미드필더와 수비수, 골키퍼를 지명하는데 12장을 사용했다.</ref>
== K리그 ==
== K리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