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런던 올림픽
대표팀 선발과 최종 명단
해방 직후인 1946년 조선축구협회는 FIFA에 정식으로 가입하면서, FIFA 월드컵과 올림픽에 축구 국가대표를 출전시킬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이후 1948년 런던 올림픽을 앞둔 조선축구협회는 광복 후 첫 국제 대회 출전에 총력을 기울였고, 미군정청과의 협의 끝에 축구팀도 런던올림픽에 출전시키겠다는 확답을 얻어내었다.
런던 올림픽 출전 확정뒤, 조선축구협회는 1948년 3월 20일부터 24일까지 런던 올림픽대표 선발전을 동대문 운동장 (당시, 서울운동장) 에서 개최하였으며, 이 선발전에 조선전업 (대전 한수원의 전신), 인천 조일양조, 연희대학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동국대학교 총 5팀이 참가하였다.
1차 선발과 자체 홍백전등의 선발전을 거쳐 1948년 5월 15일 런던 올림픽대표 최종 엔트리 16명이 발표되었으니 이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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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수 선발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논란이 끊이질 않아, 대표팀은 제대로 된 소집훈련 조차 소화하지 못한채 6월 21일 런던으로 출발했고, 조선축구협회 측은 대표팀 선발에 잘못이 있었음을 시인하며 임원진이 총사퇴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출전 결과
1948년 6월 21일 서울을 출발한 축구대표팀은 부산, 요코하마, 홍콩을 거쳐 런던에 도착하였으나 중간에 어려움이 많았다. 가장 특기할만한 것은 당초 감독이었던 박정휘씨를 건강상의 이유를 빌미로 조선체육회 측에서 출국 금지시키고, 임시로 당시 조선야구협회 시찰단 자격으로 올림픽에 참가하였던 이영민 씨를 축구 올림픽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한 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축구팀은 런던에 도착, 7월 29일 올림픽 개막식에 참가한 뒤 8월 2일 제 1회전인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와의 일전을 치루었으며, 이 경기에서 배종호, 정남식, 최성곤, 정국진 (2골)의 연속골로 5:3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올림픽 축구는 1회전 승리시, 곧바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는 조별예선 없는 토너먼트 였기에 한국 올림픽 대표팀은 첫 국제대회 출전에 8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거두게 되었다.
첨언으로,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FIFA 월드컵, 올림픽 등 FIFA가 공인하는 각종 메이져 대회 본선에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1경기 5골 이상을 넣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1경기에서 멀티골을 (2골 이상) 기록한 한국 선수 (정국진)가 나온 것도 이때가 유일하다.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며 8강 진출을 확정지은 올림픽 대표팀이었으나, 멕시코 전에서 FB 였던 박규정 씨가 부상을 당했고, 다른 출전 선수들도 빗속의 혈투를 치룬 후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다. 그러나 8강전은 한국 선수들이 쉴틈도 없이, 곧바로 멕시코전 3일뒤인 8월 5일에 치루어졌고 상대는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 이었다. 당시 스웨덴은 훗날 AC 밀란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로 군림하는 군나르 노르달이 버티고 있는 최강의 팀구성을 갖추고 있었기에 경기의 승패는 시작하자마자 갈리고 말았다. 결과는 0:12 의 한국의 대참패. 스웨덴은 한국을 물리치고 승승장구해 동대회 금메달을 차지한다. 비록 8강전에서 대패하긴 했지만 첫 세계 대회 출전에 8강 업적을 달성하며 멋진 신고식을 치루었다. 물론 사람들은 1948년 8강 신화보다 1954년 스위스의 악몽을 더 기억하는 편이지만 -_-;
결과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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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멜버른 올림픽
대표팀 선발과 최종 명단
갑작스럽게 올림픽 아시아예선 일정이 만들어짐에 따라, 아시안컵 예선 일정 사이에, 올림픽 아시아예선이 끼여있는 상당히 빽빽한 일정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 때 한국 대표팀은 아시안컵 예선과 올림픽 예선을 모두 참가했으나, 일본 대표팀은 올림픽 본선 참가에 총력을 기울이고자 아시안컵 참가를 기권하였다.
아시안컵 예선과 올림픽 예선을 모두 참가한 한국 대표팀 명단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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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 탈락
멜버른 올림픽 아시아예선은 한국과 일본의 홈&어웨이를 통해 결정되기로 하였으나, 일본 선수의 한국 입국을 불허한 이승만의 입장에 따라 1차전과 2차전 모두 일본에서 치뤄지게 되었다. 1956년 6월 3일 벌어진 1차전에서는 0:2로 패배하였고, 1주일 뒤 2차전에서는 2:0으로 한국이 승리하면서 1승 1패에 골득실도 동률. 결국 연장전까지 들어갔으나 승패가 갈리지 않음에 따라 규정에 따라 추첨을 통해 올림픽 본선 참가팀이 결정되었다.
추첨에서 일본이 결정됨에 따라 한국의 올림픽 참가 실패.
1964년 도쿄 올림픽
아시아예선 과정과 올림픽대표팀 최종 명단
1963년 겨울부터 1964년 봄까지, 1964년 도쿄 올림픽 아시아예선이 벌어졌다.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한국은 대만, 필리핀, 월남을 차례로 꺽고 본선에 진출하였다. 아시아 1차 예선은 대만과의 일전이었는데 한국 선수단은 1960년 로마 올림픽 아시아 예선 당시의 기억[1]때문에 절치부심하여 대만을 상대하였고 1차전 2:1로 승리. 2차전은 0:1로 패배 후, 승점 골득실 동률로 규정상 제3차전을 중립지역에서 치루어야 했으나, 대만의 갑작스런 올림픽 참가 포기로 한국이 2차 예선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2차 예선 상대는 필리핀이었으나, 필리핀이 자진 기권하면서 싱겁게 최종 예선에 한국이 진출했다.
최종 예선 상대는 월남이었는데 월남과의 올림픽 최종예선 1차전은 1964년 5월 30일 효창 운동장에서 벌어졌다. 1차전 결과는 3:0 대승. 2차전은 1달여후인 6월 28일에 벌어졌는데 여기서 한국은 2:2 무승부를 거두어 올림픽 본선에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1948년 런던 올림픽 본선 진출 이후, 16년만의 본선 진출이었다. 덕분에 대한축구협회는 1964년 여타 국제축구대회를 모두 참가 포기하면서까지 올림픽 준비에 총력을 기울였고, 1964년 올림픽대표팀 최종명단이 발표되었으니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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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선에서의 대실패
올림픽 본선에서 한국은 브라질, 체코슬로바키아, 아랍연합공화국[2] 와 한조를 이루었고, 1964년 10월 12일 조별 예선 1차전을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로 가졌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는 동대회에서 은메달을 차지할 정도로 강팀이었고, 이런 체코에 대해 한국팀은 그 어떤 정보는 갖지 못한채 정면승부로 도전했다. 결과는 1:6 대참패. 그나마 이이우 선수의 기습적인 중거리 슈팅으로 1골을 얻어 영패는 모면했다. 2차전은 브라질과의 경기였는데 당시 정국진 감독은 수비수였던 차태성 선수를 공격으로 스위칭하면서까지 공격 일변도로 승점을 얻어내보려고 애썻지만, 세계최강 브라질의 적수는 못됐다. 결과는 0:4 패배. 2차전 결과로 한국의 조별예선 탈락은 확정되었다.
막장은 3차전인 아랍연합공화국과의 경기에서 벌어졌는데 이미 조별예선 탈락이 확정된 한국 선수단은 의욕이 떨어진 상태였고, 설상가상으로 경기 도중 한국 선수단을 응원하러왔던 재일교포들이 한국 선수들의 조별예선 탈락 확정에 욕설을 퍼부어댐에 따라 선수들이 흥분, 하라는 경기는 안하고 응원단과 입씨름을 하는 진풍경이 경기 도중 연출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경기가 제대로 됐을리 만무, 결국 아랍연합공화국에 0:10 대패를 당한다. 이 스코어는 한국 축구 역사상 최악의 경기결과였다. 당시 아랍연합공화국은 다득점시 8강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을 상대로 골폭죽을 터뜨렸고, 한국의 자멸 덕분에 조별예선을 통과 8강을 거쳐 4강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한다. 어쨋거나 한국 축구역사상 가장 망신스러운 한페이지가 아닐수 없다.
결과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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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시드니 올림픽
결과 요약
아시아 예선과 평가전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위한 시드니 올림픽대표팀 구성은 1998년 12월 22일 이루어졌다. 이후 시드니 올림픽대표팀은 아시아예선과 평가전 포함 총 25경기에서 21승 2무 2패의 호성적을 거두었으며,[3] 이 중 아시아예선은 1차예선 전승, 2차예선 3승 1무로 총 6승 1무의 무패행진으로 시드니 올림픽 본선 티켓을 따냈다. 시드니 올림픽대표팀이 치룬 아시아예선과 평가전 매치 결과는 이하와 같다.
아시아예선아시아예선은 1차예선과 최종예선으로 나누어 치루어졌다. 1차예선에 참가한 아시아 34개국을 동부,서부,중앙 등 3개권역 총 9개조로 나누어 조편성이 되었으며, 대한민국은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대만과 함께 동부 8조에 편성되었다.
평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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