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월드컵 축구 도전사

풋케위키, 대한민국 대표 축구위키 FootballK WIKI-
110.12.141.9 (토론)님의 2017년 12월 16일 (토) 11:55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대한민국 월드컵 축구 도전사대한민국이 1954년 이후 현재까지 월드컵 본선 무대에 나가기 위해 치렀던 월드컵 아시아예선 빛 본선 경기들을 요약ㆍ기록한 문서입니다.


1954년 FIFA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

파일:1954극동.jpg
극동지역예선 경기을 앞두고 촬영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월간축구 1972년 12월호에 게재된 최광석 씨 소장 사진이다.

첫 월드컵 본선 참가를 위해 한국 대표팀은 극동지역 예선전을 거쳐야만 했다. 이 때 한국의 예선 상대국은 일본 이었는데, 원칙적으로 FIFA의 규정에 따라 일본과의 예선은 홈&어웨이 방식으로 치러져야만 했다. 그러나 1954년이면 일제강점기로부터 한국이 독립한지 불과 10년도 안되었던 시절이라, 일본 선수들이 한국땅에 들어와 경기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심지어 한국 선수들이 일본에 가서 경기를 하는 것도 못마땅히 여길 정도였는데..[1] 자칫 지역예선이 한국의 기권으로 끝날 위기에서 재일대한체육회 신희 씨와 재일사업가 정건영 씨는 이승만 대통령을 적극 설득했고, 당시 한국 대표팀 감독 이유형 씨는 반드시 일본을 이기고 돌아오겠다. 만약 일본을 이기지 모하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각오를 전달하였다. 이러한 노력 끝에 '일본에서 2경기 모두 치른다'는 전제하에 예선전 참가 허가가 떨어졌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사된 54년 월드컵 극동지역 예선은 1954년 3월 7일과 14일 도쿄 메이진진구 경기장에서 개최되었다.[2] 극동지역 예선 1차전에서, 한국 대표팀은 GK 홍덕영, FB : 박규정, 이종갑, HB : 이상의, 민병대, 강창기, FW : 최광석, 성낙운, 최정민, 정남식, 박일갑을 출전시켰으며, 1차전에서 선취골을 일본에 내주긴했으나 한국팀은 5골을 퍼부으며 1차전을 5:1로 마무리했다. 이어진 2차전에서는 일본이 거칠게 경기를 진행하면서 김지성 선수의 이빨이 부러지는 등 사고가 있었으나 한국은 주눅들지 않으며 경기를 진행해 2:2 무승부로 1승 1무의 성적으로 극동지역 예선을 통과해 월드컵 본선 무대에 참가하는데 성공하였다.


아시아 예선 결과

1954년 월드컵 대표팀이 치른 아시아예선 결과는 이하와 같다.


본선 대표팀 선발과 최종 명단

아시아예선을 통과한 월드컵대표팀의 본선 참가를 위해 대한축구협회는 1954년 5월 22일부터 24일까지 선발전을 거쳐 스위스 월드컵 대표팀 최종 엔트리를 구성하였으니 이는 다음과 같다.

파일:1954년 한국대표팀.jpg
당시 한국대표팀 선수들 사진 중 일부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스탭진
감독 김용식 KFA 작고
선수단
GK 홍덕영 조선방직 작고
함흥철 헌병사령부
FB 박규정 병참단
이종갑 특무대
박재승 특무대 생존[3]
HB 이상의 조선방직 작고
강창기 조선방직
민병대 특무대
한창화 특무대
김지성 특무대
주영광 해군
FW 박일갑 특무대
정남식 첩보대
이수남 특무대
성낙운 병참단
최영근 ?
최정민 특무대
이기주 ?
우상권 헌병사령부
정국진 해군

※ 현 소속팀은 2012년 8월 1일 기준입니다.


본선대회

참가과정

독립한지 10년이 채되지 않은데다, 정부수립 후 불과 6년, 여기에 6.25 동란까지 겪은 직후의 첫 국제대회 참가였던지라 한국대표팀은 본선티켓을 따냈음에도 본선대회가 열리는 스위스까지 가는 것 자체부터 험난한 장벽의 연속이었다. 총 22명의 한국선수단은 1954년 6월 10일, 스위스 월드컵 출정을 위해 여의도비행장[4]을 출발해 일본 도쿄 하네다에 도착했다. 하지만 하네다에서 스위스 취리히로 가는 공항편을 쉽게 구할 수 없던데다 현지사정도 밝지 못했던 대표팀은 하네다공항에서 4일동안 발이 묶인채 시간을 허비해야했다. 간신히 재일체육회의 도움으로 스위스 취리히 항공편을 구해 6월 13일, 하네다공항을 떠나 스위스 취리히로 출발하였고,[5] 하네다공항을 떠난 선수단은 필리핀 마닐라, 베트남 하노이, 인도 캘커타, 파키스탄 카라치, 시리아, 이탈리아 로마로 이어지는 대여정끝에 하네다 출발 64시간만인 6월 16일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회는 6월 16일 이미 개막된 상태였고, 한국의 1차전 경기는 선수단이 도착한지 불과 15시간 뒤인 6월 17일 오후 3시에 예정되어 있었다. 시차의 문제, 64시간동안의 여행피로 누적등을 풀 시간적 여유도 없는 상태로 대표팀은 당대 최강을 자랑하던 헝가리와의 일전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를 회고한 김용식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50여시간을 비행기 의자에 앉아있다보니 선수들의 양복바지가 모두 무릎위까지 말려올라가 취리히에 도착한 직후 선수들은 올라간 바지부터 내리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만큼 선수단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1차전 (對 헝가리)

파일:1954년 한국대표팀1.jpg
헝가리와의 경기를 앞두고 푸스카스와 악수를 나누는 한국팀 주장 주영광 씨 (우)

한국은 본선 참가국 16개국 가운데, 헝가리, 터키, 서독과 함께 본선 B조에 편성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B조 첫상대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고, 1953년에는 축구 종가를 자처하던 잉글랜드를 6:3과 7:1로 박살내버린 당대 최강 헝가리였다. 이런 헝가리를 상대로 대한민국 선수들이 내세울건 악바리 정신밖에 없었다. 하지만 악바리 정신만으로 모든걸 이겨내기엔 시차, 여행피로, 기후, 음식, 실력차까지 너무 많은 점이 헝가리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6월 17일 취리히에서 열린 경기에서 한국팀은 전반 10분 동안은 대등한 경기를 펼치기도 했으나[6] 작은대포 푸스카스 (푸슈카쉬)를 시작으로 헝가리의 득점포가 연이어 터져나왔다. 전반 4골을 실점하며 어떻게든 버티던 한국팀이었으나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피로누적으로 인한 체력고갈은 현실로 다가왔다. 경기 도중 민병대, 최정민, 성낙운, 우상권, 강창기, 박일갑 등의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주저앉고 말았던 것. 결국 필드 플레이어들이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홍덕영 선수는 헝가리 선수들의 슈팅을 막아내야 했다.[7] 결국 헝가리는 손쉬운 상대 한국을 유린하며 후반 20여분을 남기고 4골을 몰아치며 9:0 완승을 챙겨갔다. 한국의 0:9 패배 였다.

비록 한국이 0:9로 패배하긴 했지만, 한국이 치욕적으로 못한 경기는 아니었다. 위에 예시로 들었듯 축구 종가를 자처하는 잉글랜드마저 1:7로 박살날 정도로 당대 헝가리는 세계최강의 팀이었다. 같은 대회인 1954년 월드컵 예선에서 서독은 헝가리에게 3:8 대패를 당했을 정도. 하지만 서독은 끝끝내 헝가리를 물리치며 이 대회 우승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즉, 한국은 악조건 속에서도 0:9로 헝가리에게 버텨냈으니 오히려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결과였다.[8]


2차전 (對 터키)

파일:1954년 한국대표팀2.jpg
터키와의 경기를 앞두고 기념촬영한 한국팀 베스트 11



결과 요약


경기수 승리 무승부 패배 득점 실점 골득실 승점
틀:나라자료 헝가리 헝가리 2 2 0 0 17 3 +14 4
틀:나라자료 터키 터키 2 1 0 1 8 4 +4 2
독일 서독 2 1 0 1 7 9 -2 2
대한민국 대한민국 2 0 0 2 0 16 -16 0
  • 0승 2패로 조별예선 4위 기록. 본선 조별예선 탈락.

1958년 FIFA 스웨덴 월드컵

1962년 FIFA 칠레 월드컵

1960년 AFC 아시안컵에서 우승한 대한민국은 한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칠레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치뤄낸다. 예선상대는 숙적 일본, 예선전은 시작하기 전부터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경기를 앞둔 효창운동장은 상대국 일본의 일장기 게양 문제가 논란이 됐다. 당시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 하기 이전이었고 광복한지 15년이 됐지만 국민들의 식민지배에 대한 쓰린 기억은 여전히 생생히 남아있었기에 국민정서로써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장문기 축구협회장은 “월드컵이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축구대회이니 만큼 국가적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상대국 국기를 게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일장기 게양을 촉구했고 체육계도 일장기 게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문교부는 이 경기를 승인했으나 일장기 게양에 대한 입장은 확실히 밝히지 않았다. 결국 장문기 축구협회장은 장면 총리에게 허락을 받아냈고 효창운동장에는 일장기가 걸렸고 경기는 예정대호 11월6일 오후 2시에 시작됐다. 당시 효창운동장에는 수용인원을 훨씬 초과한 4만여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전반 15분만에 문정식이 왼쪽 쇄골을 부상당해 10명이 싸워야 했고, [9] 전반 21분 사사키에게 선취골을 내줬다.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전반 39분과 41분에 특무대 소속이던 정순천의 연속골로 역전에 성공하고 더 이상 양팀의 득점은 없었다. 2-1 대한민국의 역전승이었다.

1966년 FIFA 잉글랜드 월드컵

1970년 FIFA 멕시코 월드컵

단장 이상익 감독 김용식 GK 이세연 손조명 FB 김정남 김호 서윤찬 조정수 HB 임국찬 최재모 최태열 홍인웅 김정석 손태호 FW 이회택 김기복 정병탁 박이천 정강지 최상철 홍경구 정규풍 이이우 박수일

1974년 FIFA 서독 월드컵

아시아예선 대표팀 선발 명단

아시아예선 참가를 위해 대한축구협회는 1972년 12월부터 축구대표상비군을 만들어 11개월간 합숙을 하며 서독 월드컵을 준비하였다. 당시 서독 월드컵 대표팀 엔트리, 즉, 국가대표상비군 명단은 다음과 같다.[10]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스탭진
감독 민병대 KFA 작고
코치 문정식 KFA 작고
선수단
GK 이세연 신탁은행 전 대한축구협회 이사
변호영 서울은행 전 홍콩한인회 회장
FB 박영태 해병대
유기흥 해병대 한국실업축구연맹 상벌위원장
김호곤 연세대학교 울산 현대 감독
강기욱 육군 광운대학교 축구부 감독
문구호 육군
김희태 연세대학교 김희태축구교실 회장
HB 이차만 고려대학교 부경고등학교 감독
고재욱 고려대학교 한국여자축구연맹 고문
박병철 한양대학교 개인사업
FW 박이천 국민은행 인천 유나이티드 부단장
정규풍 국민은행 한국중등축구연맹 부회장
차범근 고려대학교 MBC 해설위원
김진국 육군 전 대한축구협회 전무
김재한 주택은행 대한축구협회 비상임 이사
강태현 육군
유건수 한양대학교
유동춘 한양대학교 서울공고 축구부 감독
김삼남 고려대학교

※ 현 소속팀은 2012년 8월 1일 기준입니다.

1978년 FIFA 아르헨티나 월드컵

1982년 FIFA 스페인 월드컵

1986년 FIFA 멕시코 월드컵

1990년 FIFA 이탈리아 월드컵

1994년 FIFA 미국 월드컵

1998년 FIFA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조별예선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였기 때문에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16강 진출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 본선 무대 1승도 못해봤는데 설레발ㅉㅉ 가득한 기사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1차전 상대인 멕시코전에선 하석주선수의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기록하는 등 1승 달성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는데... 흥분한 하석주의 백태클로 인해 퇴장당하면서 멕시코에게 분위기를 내주게 되어 결국 1:3 역전패를 당한다. 2차전 상대는 휘스 히딩크 감독의 네덜란드. 압도적인 오렌지군단의 파괴력과 태극전사의 무기력한 경기력이 맞물려 0:5 대패를 당하고, 차범근감독이 대회도중 경질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3차전은 김평석 대행체제로 벨기에를 상대하게 되었는데 1:1로 경기가 종료된다.


월드컵 대표팀 선발 명단

번호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1 GK 김병지 울산 현대 호랑이 선수생활 은퇴
2 MF 최성용 상무 선수생활 은퇴
3 DF 이임생 부천 SK 선수생활 은퇴
4 DF 최영일 부산 대우 로얄즈 선수생활 은퇴
5 DF 이민성 부산 대우 로얄즈 선수생활 은퇴
6 MF 유상철 울산 현대 호랑이 선수생활 은퇴
7 MF 김도근 전남 드래곤즈 선수생활 은퇴
8 MF 노정윤 NAC 브레다 선수생활 은퇴
9 FW 김도훈 빗셀 고베 선수생활 은퇴
10 FW 최용수 상무 선수생활 은퇴
11 MF 서정원 RC 스트라스부르 선수생활 은퇴
12 DF 이상헌 안양 LG 치타스 선수생활 은퇴
13 DF 김태영 전남 드래곤즈 선수생활 은퇴
14 MF 고종수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선수생활 은퇴
15 MF 이상윤 천안 일화 천마 선수생활 은퇴
16 DF 장형석 울산 현대 호랑이 선수생활 은퇴
17 MF 하석주 세레소 오사카 선수생활 은퇴
18 FW 황선홍 포항 스틸러스 선수생활 은퇴
19 DF 장대일 천안 일화 천마 선수생활 은퇴
20 DF 홍명보 벨마레 히라츠카 선수생활 은퇴
21 FW 이동국 포항 스틸러스 전북 현대 모터스
22 GK 서동명 상무 선수생활 은퇴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발 명단[11]

번호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1 GK 이운재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선수 생활 은퇴
2 MF 현영민 울산 현대 호랑이 전남 드래곤즈
3 MF 최성용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선수 생활 은퇴
4 DF 최진철 전북 현대 모터스
5 MF 김남일 전남 드래곤즈 전북 현대 모터스
6 MF 유상철 가시와 레이솔 선수 생활 은퇴
7 MF 김태영 전남 드래곤즈
8 MF 최태욱 안양 LG 치타스
9 FW 설기현 RSC 안더레흐트 인천 유나이티드
10 FW 이영표 안양 LG 치타스 선수 생활 은퇴
11 MF 최용수 JEF 이치하라
12 DF 김병지 포항 스틸러스 전남 드래곤즈
13 DF 이을용 부천 SK 선수 생활 은퇴
14 MF 이천수 울산 현대 호랑이 인천 유나이티드
15 MF 이민성 부산 아이콘스 선수 생활 은퇴
16 DF 차두리 고려대학교 FC GS
17 MF 윤정환 세레소 오사카 선수 생활 은퇴
18 FW 황선홍 포항 스틸러스
19 DF 안정환 페루자
20 DF 홍명보 벨마레 히라츠카
21 FW 박지성 교토 퍼플상가
22 MF 송종국 부산 아이콘스
23 GK 최은성 대전 시티즌

2006년 FIFA 독일 월드컵

2002년 월드컵 본선 무대 4강이라는 어마어마한 결과를 낸 이후, 독일 월드컵을 준비하기까지 움베르투 코엘류, 조 본프레레 감독을 거쳐 딕 아드보카트 감독 체제로 월드컵 본선무대에 참가하게 된다. 토고를 상대로 2대1 역전승, 프랑스와 1대1로 비기는 듯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대업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나 스위스에 2대0으로 패해 1승 1무 1패 그분의 기운이 느껴진다...로 16강 진출에 실패한다.

2006년 6월 23일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알렉산더 프라이의 득점상황에서 부심이 오프사이드 기를 들었으나 오라시오 엘리손도 주심이 오프사이드 휘슬을 불지 않고 경기를 진행하였던 것에 대한민국 국민이 FIFA에 항의하면 재경기 열린답니다 모두 전자서명에 동참해주세요 라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12]

2006년 6월 13일
15:00
대한민국 2 - 1 토고 슈타디온 프랑크푸르트
관중수: 48,000
심판: 그레엄 폴 잉글랜드
54' 이천수
72' 안정환
31' 쿠바자
2006년 6월 18일
21:00
프랑스 1 - 1 대한민국 첸트랄슈타디온
관중수: 43,000
심판: 베니토 아르춘디아 틀:나라자료 멕시코
8' 티에리 앙리 81' 박지성
2006년 6월 23일
21:00
스위스 2 - 0 대한민국 슈타디온 하노버
관중수: 43,000
심판: 오라시오 엘리손도 아르헨티나
23' 센데로스
77' 알렉산더 프라이
번호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1 GK 이운재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선수생활 은퇴
2 DF 김영철 성남 일화 천마 선수생활 은퇴
3 DF 김동진 FC GS 무앙통 유나이티드
4 DF 최진철 전북 현대 모터스 선수생활 은퇴
5 MF 김남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 전북 현대 모터스
6 DF 김진규 주빌로 이와타 FC GS
7 MF 박지성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생활 은퇴
8 MF 김두현 성남 일화 천마 수원 삼성 블루윙즈
9 FW 안정환 MSV 뒤스부르크 선수생활 은퇴
10 FW 박주영 FC GS 알 샤밥 FC
11 FW 설기현 울버햄튼 원더러스 인천 유나이티드
12 DF 이영표 토튼햄 핫스퍼 선수생활 은퇴
13 MF 이을용 트라브존스포르 선수생활 은퇴
14 FW 이천수 울산 현대 호랑이 인천 유나이티드
15 MF 백지훈 FC GS 울산 현대
16 FW 정경호 광주 상무 선수생활 은퇴
17 MF 이호 울산 현대 호랑이 울산 현대
18 DF 김상식 성남 일화 천마 선수생활 은퇴
19 FW 조재진 시미즈 S-펄스 선수생활 은퇴
20 GK 김용대 성남 일화 천마 FC GS
21 GK 김영광 전남 드래곤즈 경남 FC
22 DF 송종국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선수생활 은퇴
23 DF 조원희 수원 삼성 블루윙즈 오미야 아르디자
* 예비명단 : 김병지(GS), 유경렬(울산), 김정우(나고야), 장학영(성남), 차두리(프랑크푸르트)

2010년 FIFA 남아공 월드컵

2014년 FIFA 브라질 월드컵

번호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1 GK 정성룡 수원 삼성 블루윙즈 수원 삼성 블루윙즈
2 DF 김창수 가시와 레이솔 가시와 레이솔
3 DF 윤석영 퀸즈 파크 레인저스 퀸즈 파크 레인저스
4 DF 곽태휘 알 힐랄 알 힐랄
5 MF 김영권 광저우 에버그란데 광저우 에버그란데
6 DF 황석호 산프레체 히로시마 가시마 앤틀러스
7 MF 김보경 카디프 시티 카디프 시티
8 MF 하대성 베이징 궈안 베이징 궈안
9 MF 손흥민 바이엘 04 레버쿠젠 바이엘 04 레버쿠젠
10 FW 박주영 아스날[13] 알 샤바브 FC
11 FW 이근호 상주 상무 엘 자이시
12 DF 이용 울산 현대 상주 상무
13 FW 구자철 마인츠 05 마인츠 05
14 MF 한국영 가시와 레이솔 카타르 SC
15 MF 박종우 광저우 푸리 광저우 푸리
16 MF 기성용 스완지 시티 스완지 시티
17 MF 이청용 볼턴 원더러스 볼턴 원더러스
18 FW 김신욱 울산 현대 울산 현대
19 MF 지동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FC 아우쿠스부르크
20 DF 홍정호 FC 아우쿠스부르크 FC 아우쿠스부르크
21 GK 김승규 울산 현대 울산 현대
22 DF 박주호 마인츠 05 마인츠 05
23 GK 이범영 부산 아이파크 부산 아이파크
* 예비명단 : 김진현(세레소), 김기희(전북), 장현수(광저우), 이명주(포항), 김민우(사간 도스), 남태희(레퀴야), 김진수(니가타)[14]


참고

  1. 왜냐하면 국외로 선수단이 나가 경기를 하려면 체류비 등 외화가 필요한데, 당시 이승만 정부는 외화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만약 한국팀이 일본에게 질 경우, 그게 무슨 망신이냐. 숫제 경기를 안하는게 낫지 않겠냐?'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만큼 한국팀의 승리 가능성을 낮게 점치고 있었던 셈.
  2. 여담으로 이 경기가 최초의 한일전이었다.
  3. 2009년 김현회 기자의 기사 이후로 생존여부가 분명치않음 자세한건 추가바람. [1]
  4. 당시는 서울 여의도에 공항이 있었다. 지금의 김포로 공항이 옮겨진건 1958년 이후의 일.
  5. 당시 6월 13일 표도 20장만을 구해 22명인 대표팀이 타기엔 좌석수가 모자랐으나, 사정을 들은 영국인 부부가 좌석을 양보해줘 간신히 스위스로 출발할 수 있었다.
  6. 박규정 씨의 회고에 의하면 최정민 선수가 1:1 찬스도 잡았었다고 한다. 이때 한국이 선취골을 넣었다면 좋았을걸..
  7. 당시 홍덕영 선수의 선방이 없었다면 15:0도 가능했다는게 중론이다. 훗날 회고에서 홍덕영 씨는 헝가리 선수들의 슈팅을 막을때마다 바위를 막는 기분이셨다고. 경기 끝난 후 온몸에 멍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8. 그러나 대부분 한국축구사에서 스위스 월드컵은 본선 참가에 의의를 두는 잊고싶은 대회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다.
  9. 당시에는 선수교체 제도가 없었다.
  10. 최종예선이었던 호주전 엔트리 기준이다.
  11. 현 소속팀은 2014년 10월 기준입니다.
  12.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 이호의 발에 맞고 굴절된 공이 알렉산더 프라이에게로 연결된 것이기 때문에 규정상 온사이드였으며, 주심은 이 상황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오프사이드 선언을 하지 않았던 것. 당시 유일하게 온사이드를 주장한 해설가 신문선씨는 국민여론에 휘말려 좌초(?)되었다.... 안습
  13. 실제로는 이미 상호 해지로 아스날을 떠나 무직 상태였다.
  14. 본래 최종 엔트리에 있었으나 부상으로 낙마, 그 대신 박주호가 최종 명단에 올랐다.


[[[분류:월드컵]]